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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탈근대적 사유의 정치학: 근대 정치 전복의 꿈
이 진 경
1.포스트모더니즘과 탈근대적 정치
'탈근대적 정치'라는 말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두 가지 항목이 있다면, 하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사회운동'일 것이다. 이 두 단어는 또 다른 단어들의 두 가지 계열을 연상하도록 자극한다. ①포스트모더니즘-문학-혼성모방(pastiche)-키취(kitsch)-대중문화-미디어-시뮬레이션-재현 불가능성-총체성의 소멸-보편적 거대이론의 불가능성-...; ②새로운 사회운동-낡은 사회운동 비판-맑스주의 정치학 비판-포스트맑스주의-노동운동의 중심성 비판-총체성 비판-미시적 영역들의 독자성-여성운동, 동성애 운동 혹은 환경운동의 부상-...
이런 연상의 연쇄작용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은)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며, 한국의 자칭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반복하여 암송한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프랑스의 '원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스케치한 것이기 때문이다(강내희 외 편, 1989; 김욱동 편, 1990). 혹은 그것은 '새로운 사회운동'의 이론가들이 자기 주장의 새로움을 부각시키기 위해 만들어놓은 연쇄며, 역시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반복하여 암송했던 단어들이며, 근본적으로는 68년 혁명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 '구' 좌파의 오류가 그 근저에 있기 때문이다(정수복, 1993). 정치적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연쇄적으로 연상되는 이 단어들은, 보편적인 인간해방이 가능하리라는 생각, 그것의 중심에 노동자계급이 있으며,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당이라는 조직이 있다는 생각, 따라서 여타의 운동들은 이러한 중심적 영역과 중심적 운동의 지도에 따라야 한다는 거대한 생각을 겨누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단어들의 이 두 가지 계열은 기존의 좌파 정치, 기존의 맑스주의적 사유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된다(Wood, 1993 참조).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것이 손쉽게 부각시킬 수 있는 것으로 인해, 사실은 그러한 단어들을 배태했던 것을, 근대적 사유와 근대적 정치를 넘어서려는 노력의 근본적 성격을 그만큼 쉽게 가리고 만다. 이제 자세히 보겠지만, 탈근대적 사유, 탈근대적 정치는 무엇보다도 우선 근대적 사유, 근대적 정치, 혹은 근대적 사회질서의 전복에 관한 사유였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자본주의라고 불리든,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근대 사회를 '넘어서려는' 노력이었고, 기존의 것보다 좀더 근본적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노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맑스주의나 노동운동, 당을 겨냥했던 것은, 기존의 좌파적 태도만으로는 그러한 근본적 '넘어섬'이 난망하며, 오히려 기존 좌파 자신이 그러한 근대적 틀 안에 머물러 있다는 문제의식에 기인한다(Ryan, 1996: 147 이하 참조).
이는 프랑스의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스트'--그들의 대부분은 이 명칭을 거부하며 비판한다--들이 대개 좌파, 아니 기존 공산당에 대해 좌익적 비판을 수행하던 극좌파 맑스주의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쉽게 확인된다. 미국을 경유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전세계적인 유행으로 만든 장본인인 료타르(Lyotard)나, 그와 함께 대표적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간주되는 보드리야르(Baudrillard)가 그렇다. 약간 다르지만 들뢰즈(Deleuze)와 함께 책을 썼던 가타리(Guattari)는 평생을 밀리땅(militant, 戰士)로서 다양한 영역을 횡단하며 활동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아니지만 탈근대적 사상가의 한 사람인 네그리(Negri)는 아우토노미아(자율)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좌익 그룹의 유명한 지도자였다. 한편 70년대 이후 들뢰즈 역시 자신이 맑스주의자임을 명시하여 반복하여 말하고 있고(Deleuze, 1993: 190; 박철화, 1996: 79), 해체주의자로 유명한 데리다(Derrida) 또한 자신이 맑스적인 사상가임을 주장하고 있다(Eribon, 1993). 사르트르(Sartre)이후 가장 유명한 전투적 지식인이었던 푸코(Foucault) 역시 한때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탈퇴한 경력을 갖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이던 시절에 이러한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왜냐하면 결국은 맑스주의 비판으로 귀착되고 마는 저 어설픈 단어들의 연쇄적 연상작용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68혁명의 파도 위에서 탈근대적 정치를 사유하려던 노력을 충분히 배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지금, 이미 유행의 물결이 지나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도사(김성기, 1991)조차 탈근대적인 사유를 '프랑스제 담론의 그늘'(김성기, 1996)이라고 비난하며 슬며시 빠져나가는 이 시기가 차라리 '탈근대적 정치'라는 철 지난 주제를 다루기에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탈근대적(脫近代的) 내지 반근대적(反近代的) 사상은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무엇보다도 정치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주체나 진리 같은 철학적 주제를 다룰 때도, 공장이나 감옥, 병원 같은 제도를 다룰 때도, 혹은 성이나 미디어 같은 문화 현상을 다룰 때조차도 그것은 모두 정치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예컨대 푸코가 성과 성욕에 대해 말할 때(Foucault, 1990), 료타르가 언어게임에 대해 말할 때(Lyotard, 1992), 보드리야르가 소비사회나 시뮬레이션에 대해 말할 때(Baudrillard, 1991; 1992), 들뢰즈/가타리가 정신분열증이나 '얼굴'에 대해 말할 때(Deleuze & Guattari, 1987), 그들은 그것을 삶의 문제, 삶의 방식에 관한 문제, 삶의 방식을 전복하고 변환시키는 문제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탈근대적 사상에 관한 가장 흔한 오해와 단견은 정치를 다루는 것조차 예술이나 문화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치를 문화화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정치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요체는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실천이다. 요컨대 탈근대적 사상은 근본적으로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문제를 다루며, 그것의 변환 내지 전복을 사유하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탈근대적 정치에 관한 사유며, 그런 만큼 정확하게도 근대 정치에 대한 비판이고, 근대적 정치학에 대한 비판이다. 이와 동일한 이유로 이른바 '새로운 사회운동'의 정치학은 불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낡은 운동과 새로운 운동의 대비가 아니라, 낡은 운동이든 새로운 운동이든 운동하는 방식, 운동조직, 운동조직들 간의 관계들을 변환시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새로운 영역을 주목하는 것만큼이나 기존의 운동--특히나 노동운동--자체를 변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탈근대적 사유는 삶과 운동을 근대 정치의 한계를 넘어서 근본적으로 다시 사고하려는 노력이다.
2.근대 정치의 문제설정
홉스(Hobbes)의 질문은 정치에 관한 근대적 관념을 이해하는데 매우 적절한 통로를 제공해준다. 그는 국가 내지 사회는 인간이라는 요소들로 구성된다고 보았고, 이런 이유에서 인간이란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Hobbes, 1982: 151). 홉스가 출발점으로 삼는 인간은 자신의 의지, 자신의 욕구를 가진 존재였다. 그런데 사람들 간에 신분에 따른 등급의 차이가 있던 이전과 달리, 홉스는 그 모두가 동등하다고 보았다.
이는 아마도 14세기에 이르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시장경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장에서 거래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서로 동등한 계약의 당사자다. 이는 돈을 가진 상인이 장인이나 직공들에게 특정한 상품의 생산을 주문하는 선대제(先貸制)의 경우에도, 혹은 거대 상인과 소규모 상인의 거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와 권력에 따른 실질적인 불평등이 있는 경우에도, 양자는 동등한 입장에서 계약하고 그것을 이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홉스가 보기에는,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욕구와 의지를 가지며, 그것들이 동등하다고 하자마자 곤란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사람들 각자가 하고자 하는 바가 다르고 욕구하는 바가 제 각각이라면, 그것들 간에는 충돌과 대립이 불가피하다. 즉 그러한 욕구나 의지를 그대로 둔다면 인간은 서로 간에 늑대가 되어 싸우게 될 것이다. "만인(萬人)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처럼 무질서하고 혼돈스런 상태를 홉스는 '자연상태'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대체 질서란 대체 어떻게 가능할 것이며, 사회란 대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홉스의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인간 개개인이 자유로운 의지를 갖는다는 생각, 그리고 그러한 자유의지들은 서로 동등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즉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적 전제를 인간이라는 개념 안에 끌어들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질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그러한 기초에서 출발하는 경우에 사회나 사회적 질서란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는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사회 개념, 근대의 사회적 질서 개념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질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근대적인 사회사상, 근대적인 정치사상의 출발점이 되는 질문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즉 그것은 근대 정치에 관한 사유가 집약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근대정치의 문제설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17-18세기에 화려하게 꽃피운 다양한 사회사상이나 정치사상은 모두 이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들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홉스 자신은 이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끔찍한 자연상태를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자신들의 욕구와 의지를 군주에게 위임하기로 (계약)하고 그의 통치에 따른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로크나 루소 같은 계약론자가 이용하는 개념은 좀 다르지만 해결책의 중심에 위임/양도와 계약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점에서는 홉스와 공통적이다(Rousseau, 1975). 루소의 경우에는 자연상태를 이처럼 악으로 가득한 사회로 정의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 상태는 차라리 선이 없는 만큼 악도 없는 상태요, 지배당하고 하지 않는 만큼 지배하려는 욕망도 없는 상태라고 말한다(Cassirer, 1995: 346-347). 그것은 야생동물과 마찬가지로 살아가는 상태인 셈이다. 그런데 인간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기는 매우 곤란해지게 된다. 즉 자연상태와는 다른 질서를 도입할 필요가 생긴다. 여기서 사람들은 계약을 통해 새로운 관계, 새로운 질서, 새로운 법을 만들어낸다(Plamenatz, 1986, II: 12). 자연상태와 대비되는 이러한 질서를 그는 '시민상태'라고 부른다. 사회란 이런 계약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계약에 의해 탄생한 사회에서 인간은 계약된 법과 규칙에 의해 사회를 통치하도록 대표자에게 자신의 권리를 위임하고 양도한다. 바꿔 말하면 대표자들은 인민의 권리를 양도받아 그들의 의지를 대행한다.
자연법 이론 내지 자연권 이론은 홉스와 달리 질서지워진 자연상태, 자연법을 가정하지만, 국가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집단과 법을 계약에 의해 설명한다(Sabine/ Solson, 1983, I: 562-563). 즉 자연상태와 계약상태를 구별하며, 계약상태는 양도 내지 위임과 대의, 대행이라는 관념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사고틀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계약'이란 관념이 자연상태와 대비되는 관계를 특징짓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시장에서 인간관계가 근대 사회 내지 근대 정치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근대 정치의 문제설정에 공통된 사고방식이나 개념을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근대 정치는 욕구의 주체, 의지의 주체, 주권의 주체, 권리의 주체라는 관념에서 출발한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동등한 수준에서 포괄하는 '인간'이라는 관념이 그것이다. 인간은 욕구를 갖는 자고, 권리를 소유하는 자며, 권력을 행사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욕구, 권리, 권력의 '주체'다.
둘째, 여기서 추론되는 것인데, 권리나 권력은 그러한 주체가 소유하고 행사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관념이다. 주권이나 자연적 권리는 각자의 인간이 소유하는 어떤 것이고, 권력 역시 그것의 사용을 위임받은 대표자가 소유하고 행사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저항이나 혁명은 권리를 위임받아 권력을 소유한 대표자가 적절하지 못하게 그것을 사용하고 행사하는 경우, 그것을 다시 빼앗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대표자에게 양도된다. 여기서 권리나 권력은 인간이라는 주체가 소유하거나 빼앗을 수 있는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셋째, 각자가 소유한 권리는 대표자들에게 위임.양도된다. 인민의 뜻을 대신하고 대의(代議)하는 이 대표자들은 그들의 의지를 대행하여 권력을 행사한다. 다시 말해 정치란 권리를 위임받는 대표자들에 의해 대의되고 대행된다.
넷째, 따라서 정치의 장(場), 정치적 권력이 사용되고 행사되며, 그것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는 영역은 일상적인 영역과 구별되는 별도의 영역을 갖는다. 예컨대 정치는 경제로부터 분리되고, 과학이나 지식에서 독립되며, 일상생활의 영역과 다른 세계를 형성한다. 뒤집어 말하면, 정치는 경제의 영역에 개입해선 안되고, 과학이나 지식의 영역에 관여해선 안되며, 일상생활의 영역은 정치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이론적으로 명확하게 보여주었던 것은 애덤 스미스(Adam Smith)였다. 그는 경제적 장(場)인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동적으로 조절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정치가 개입하지 않아도 질서가 가능함을 증명했다. 이를 근거로, 그는 정치는 경제에 개입해선 안되며 경제는 경제로서 그대로 두어야 한다(Laissez-faire, 프랑스어로 '내버려 두라'는 뜻이다)고 주장했다(Smith, 1992). 자유방임주의라고 흔히 불리는 이런 입장은 홉스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극단적인 양상을 취하며, 이후 경제는 물론 다른 영역에 대해서도 자유주의의 일반적 원리가 된다.
다섯째, 이 대의적인 권력, 대행하는 권력은 인민들의 부분적인 의지, 특정한 집단의 의지가 아니라 인민 전체의 일반적인 의지, 보편적인 의지를 대의하고 대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정치란 서로 이해관계나 의지가 상충되는 다양한 집단들을 통일하여 하나의 보편성, 총체성을 획득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특수한 이해를 갖는 부분적인 집단들은 정치의 총체성을 위해서 자신의 특정한 의지를 양도하고 양보해야 한다.
정치나 제도, 국가, 권력 등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대개 이러한 사고방식을 공통의 전제로 하고 있다. 또한 정치를 저항과 전복이라는 차원에서 사유하는 경우 역시 대개는 이러한 근대의 공통된 관념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이것이 근대에 대한 비판이 겨냥하는 지점이며, 바로 이 점이 좌파의 정치적 이론이나 운동에 대해서 그러한 비판이 주목하는 지점이다.
3.근대 정치에 대한 비판적 지점들
이러한 정치적 관념을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포괄적으로 비판했던 것은 푸코였다. 푸코는 한편으로는 의학이나 정신의학, 인간과학, 범죄학 등 '담론'이라고 불리는 것을 대상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병원이나 수용소, 감옥 등 담론과는 다른 일종의 물질적 장치를 대상으로 권력이 사용하는 기술과 권력이 작동하는 양상을 추적한다.
먼저 권력의 문제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극한적 사례로서 정신의학과 정신병원을 보자. 푸코에 따르면 서양의 경우 16세기까지 광기(狂氣)는 삶의 방식 가운데 특이한 하나였고, 광인들은 보통 사람들과 뒤섞여 함께 살거나, 모여서 방랑을 하며 살았다. 햄릿의 이상한 행동은 광기 탓으로 간주되지만, 누구도 그를 감금하지 않았다. 동키호테 역시 광인이며, 기행(奇行)을 반복하며 떠돌아다니지만, 누구도 그를 감금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종종 근심 내지 비웃음의 대상은 되었지만, 그들을 병자 내지 환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반면 17세기에 이르면 광인들은 부랑자, 가난뱅이, 게으름뱅이, 거지, 범죄자 등과 함께 갇히게 된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르면 부랑자나 게으름뱅이 등은 더 이상 갇히지 않고 풀려나지만, 광인과 범죄자는 그대로 남는다(Foucault, 1967). 그들은 분리되어 범죄자는 감옥에 갇히고, 광인은 병원에 갇힌다. 그리고 광인을 그 '증상'에 따라 여러 종류로 구분하고, 그들을 다루는 방법이 발전한다. 여기서 정신의학이 탄생한다. 이제 그들은 광인이 아니라 정신적인 어떤 질병을 가진 자, 즉 '환자'로 정의되고, 그들의 광기는 치료되어야 할 질병으로 정의되며, 그들을 다루는 사람은 그 병을 치료하는 '의사'로 정의된다. 의사가 환자로 간주되는 사람에게 취하는 모든 조치는 '치료'라고 불린다. 환자는 그것을 거부해선 안 된다. 그럴 경우 심지어 폭력과 강제를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의사는 그들에 대해 치료라는 행위를 할 수 있는 주체고, 환자는 의사 앞에 불려나가 그 '치료'를 받아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예컨대 말(馬)에 유별나게 집착하는, 그래서 사람보다 말에 대해 더 애정을 갖고 있는 아이가 있다면 그는 일종의 환자다. 그는 의사와 상담해야 하며, 의사가 지시하는 치료를 받아야 한다. 영화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에서 환자인지 아닌지 모호한 주인공은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결국은 붙잡혀 강력한 '치료'를 받는다. 그리고 치료의 결과 그는 환자라는 말에 적절하도록 확실하게 미쳐버린다.
그들이 갇혀 있는 병원에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그리고 아무리 강하게 외치든 그것은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발언도 들리지 않는다. 거기서 말할 수 있는 자, 주체는 오직 의사뿐이다. 물론 의사라고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정신병리학의 범위 안에서, 그것이 허용하는 제한된 개념과 말을 할 뿐 이다. 또 양자 사이에서 어떤 행동을 능동적으로 취할 수 있는 것 역시 '치료'할 수 있는 주체인 의사뿐이다. 물론 이 역시 정신병리학이 제시하거나 허용하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환자의 능동적 행동은 발작이요 증상으로 간주된다. 이를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 환자의 행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때로는 강제할 수 있는 병원의 배치가 작동한다. 의사, 간호사, 철창이 달린 '병실', 묶을 수 있는 침대, 무력화시키는 약. 여기서 푸코는 말할 수 있는 자와 말할 수 없는 자를 가르는 권력, 치료라는 능동적 행위를 하는 자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를 가르는 권력을 발견한다. 또한 광인들을 환자라는 이름에 걸맞는 방식으로만 사고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권력이, 더불어 의사를 정신병리학에서 규정하는 특정한 방식으로만 사고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권력이 작동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는 단지 정신병원이라는 극단적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푸코는 성(sexuality)이라는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유사한 권력을 찾아낸다(Foucault, 1990).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의 성에 관련된 문헌들이 폭증한다. 대개는 의학자들이 쓴 의학적 문헌인데, 크라프트-에빙(Kraft-Ebing)이 쓴 {성의 정신병리학}이 그중 가장 유명하다. 이런 책들은 몇 가지 공통성을 갖고 있었다.
첫째, 여성의 육체와 성욕을 공격한다. 예컨대 여성의 성에 대한 권위자로 간주되던 액턴(W. Acton)은 조신하고 정상적인 여성은 강한 성욕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강한 성욕을 가진 여성을 비정상적이고 조신하지 못한 여성으로 간주했다. 그러한 강한 성욕은 남편이나 아이들에게 매우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둘째, 어린이의 자위를 교육의 영역으로 정의하여, 감시하게 만들었다. 일찍이 18세기에 스위스 의사 티소(Tissot)는 어린이의 자위는 아이의 건전한 도덕적 생활은 물론 건강한 신체적 발육에도 매우 유해하다고 하는 논문을 발표해 유명해졌다. 이는 이후 대부분의 의사나 계몽가, 교육가들이 반복하는 견해가 된다. 19세기에는 어린이의 이런 성행위가 교육의 중요한 대상이 되고, 아이의 행동은 선생이나 부모의 세심한 관찰과 감시 아래 놓이게 된다.
셋째, 정상적이지 않은 성행위를 질병으로 정의하고 연구한다.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은 물론 노출증, 의복도착, 절편음란증(fetishism), 수간, 동성애, 자기단독성욕 등등의 성적인 행위들이 정신적인 '병'으로 정의된다. 성을 다룬 대부분의 책이 의학문헌이었다는 점은 이와 관련된 것이다. 이제 이전에는 '도착' 내지 '변태'라고 간주되던 특이한 성적 행위들이 '질병'으로서 정신의학의 대상이 된다(이상에 대해서는 Kern, 1996 참조).
이럼으로써 여성들의 성욕과 신체, 아이들의 신체와 행동, 나아가 성적인 행동과 신체 전체가 의학적 시선의 대상이 된다. 억제된 금욕적 성욕, 정상적인 성행위가 건강한 신체, 건전한 도덕의 요건이 된다. 비정상과 정상을 나누는 규칙들은 단지 의사의 시선뿐만 아니라, 성욕이 작동하는 내밀한 공간 안에서 부모의 시선, 남편의 시선, 부인의 시선을 통해 대상이 된 가족의 신체를 겨냥한다. "저 아이가 혹시 자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저 사람이 혹시 '변태'는 아닐까?" 나아가 그것은 결국은 자기자신의 신체를 겨냥한다. "저 사람이 나를 변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이런 상상을 하고 욕망하는) 내가 혹시 변태인 건 아닐까?" 이 시선을 통해 각자는 규범적이고 정상적인 주체, 건전하고 건강한 주체로 만들어진다.
요컨대 푸코가 근대적 권력장치에 대한 연구를 통해 드러내는 것은 권력이 작동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로 구별된다. 첫째, 정신병원이나 수용소, 감옥 등이 그렇듯이, '인간' 내지 정상적인 '주체'를 정의하는 장치들이다. 이는 광인, 부랑자, 범죄자 등을 사회적 해충으로, 허용할 수 없는 타자로 정의함으로써 인간 내지 주체의 범위를 규정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선 그런 장치들이 그려주는 경계선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한다. 둘째, 개개인을 정상적인 인간, 주체로 만들어내는 장치들이다. 이는 개개인들로 하여금 정상적인 행동과 삶의 규칙들에 따라 행동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규율들을 통해 작용한다. 감옥에서 이루어지는 '교정'(矯正), 정신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치료', 수용소에서 행해지는 '노동' 등이 그것이다. 이는 또한 인간의 외부 아닌 내부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노동, 집에서 행해지는 '가정교육' 등이 그것이다. 셋째, 그러한 훈육적 활동을 자신이 필요해서 자신이 행하는 것이라는 동일시 기제. 훌륭한 교육은 내가 제대로 된 인간이 되는데 필요해서 내가 선택한 것이고, 숙련된 노동은 내가 생활하는데 필요해서 내가 선택한 것이며, 건강한 성적인 행동은 내 신체와 내 생활을 위해 내가 규제하는 것이다 등등(이진경, 1997: 150 이하 참조).
여기서 신체와 생활, 사고와 행동을 특정한 방식으로 길들이고 훈육하는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시적인 권력. 그런데 정치가 권력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면, 권력이 작동하고 있는 정신의학이나 성의학, 정신병원이나 가정, 나아가 감옥과 학교, 공장에서 푸코가 정치를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를 푸코는 '미시정치'(micro-politics)라고 부른다. 하지만 쉽게 알 수 있듯이, 여기서 푸코가 포착하는 권력과 정치의 개념은 앞서 보았던 근대적인 권력 내지 정치의 개념과 매우 다르다. 그것은 근대적인 정치 개념의 전제를 비판하고 공격한다.
첫째, 정치의 장은 일상생활의 장, 경제의 장, 과학의 장과 분리되지 않는다. 반대로 정확하게도 그 각각의 장마다 적절한 주체와 대상을 정의하고, 개개인을 그런 주체와 대상으로 생산하는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예들 들어 의학이나 자연과학적 지식 역시 말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고, 특정한 방식으로만 보고 말하게 하는 권력이 작동한다. 권력은 모든 곳에 있다. 모든 곳은 권력의 벡터가 작용하는 정치적 장이다.
둘째로, 인간이 권력을 소유하고 이용하는 주체라는 관념이 해체된다. 반대로 인간이란 그러한 권력이 작용함으로써 생산된다. 즉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이름이 바로 인간이다. 그렇지 못한 자는 인간이 아니다. 예를 들어 17세기경에 유럽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나타나는 부랑자들은 '사회적 해충'이지 인간이 아니다(Foucault, 1967: 50). 혹은 광기를 갖고 있는, 언제 불지르거나 사람을 다치게 할 지 모를 광인들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세계,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는 부랑자나 광인에게는 말할 권리, 행동할 권리가 없다. 그들로부터 인간을 구별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17세기 유럽 전역에서 대대적인 감금과 노역이 행해진다. 그들을 가둔 수용소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범위가 어디인지를 표시하는 장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비인간들을 길들여 인간으로 생산해내는 장치였다.
공장, 학교, 감옥, 병원 역시 이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예컨대 정신병원에서 광인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정신의학의 개념과 그것이 제공하는 개념, 기술을 통해서 '의사' 내지 '간호사'라는 주체로 생산된다. 아무리 맘씨 좋은 사람이라도 그가 정신병자를 상대하는 한, 정신의학이 제공하는 개념에 따라서 판단하고 그것이 제공하는 기술에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의사'나 '간호사'라는 주체가 되지 못하며, 주체로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한다. 학교는 교육과 훈육을 통해 사회적으로 적절한 주체를 생산한다. 공장은 개개인을 파편적인 동작의 반복을 하루종일 수행할 수 있는 근대적 노동자라는 주체로 생산한다.
셋째, 권력은 인간이나 어떤 '주체'가 소유하고 점유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다(Foucault, 1989: 50). 반대로 각각의 장 안에서 개개인으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규제하고 강제하는 전략이나 기술이고, 그러한 행위의 반복을 통해 개개인을 그 장 안에서 정의된 주체로, 혹은 대상으로 생산하는 장치다. 예를 들면 19세기에 성을 대상으로 했던 정신의학에서 권력은 의사의 소유물이라기보다는 의사 없이도 가정에서, 침실에서 실행되는 전략과 기술을 통해 작동했다. 벤덤의 유명한 원형감옥은 감시자 없이도 작동하는 권력장치요 권력기술의 이상(理想)이었다. 그것은 지배/피지배와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며, 지배자 없이 작동한다. <모던 타임즈>에서 챨리로 하여금 나사를 조이라고 말하고 강제하는 것은 옆에서 일하는 동료며, 물건을 실어나르는 콘베이어 벨트였다.
권력은 의사나 간호사가 소유하기 이전에 어떤 개인을 의사나 간호사로 생산한다. 그것은 소유되기 이전에 행사된다. 또한 의사나 간호사가 가진 권력은 사실 광인을 환자로 생산하는데 작동하는 권력의 일부일 뿐이다. 그것은 의사나 간호사만큼이나 병원의 철창과 벽, 침대의 가죽끈, 의사가 사용하는 약 등을 통해서 작동하는 것이다.
4.근대 국가와 권력
그렇다면 국가의 문제는 어떤가? 국가는 보통 근대 사회에서 정치의 특권적인 영역이었고, 권력의 문제는 국가적 권력의 문제로 다루어져 왔다. 푸코나 탈근대주의자들처럼 권력 내지 정치의 문제를 정의한다면, 국가는 오히려 그러한 정치적 영역에서 제외되는 아이러니가 나타나지 않는가? 국가는 비-정치의 영역인가? 거기에서 작동하는, 너무도 분명하게 가시적인 권력의 문제는 외면해도 좋은가?
확실히 국가권력, 국가적 정치를 도외시하고 정치의 문제를 사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이 결여된 정치적 사유는 취약하다. 그런데 흔히 알고 있듯이 탈근대주의가 탈국가적 정치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는 논자에 따라 큰 차이가 있으며, 국가적 권력의 문제를 상대적으로 외면하는 사람 역시 없지 않지만, 대개는 기존에 강조되던 영역과 다른 지대를 정치의 문제로 부각시키면서 기존의 개념적 영역과 대립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다.
푸코는 근대에 이르러 국가 권력의 작동방식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측면을 주목한다. 그것은 통치(government)와 치안이라는 배치에 관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통치란 목적에 용이하게 이를 수 있도록 정리된, 사물들의 올바른 정렬이다." 이러한 통치는 그 자체의 확고한 대상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근대 이전의 군주권과 명백히 구분된다. "가령 통치는 가능한 최대량의 부가 산출되도록 보장해야 하며, 사람들이 충분한 생계수단을 제공받도록, 또한 인구가 증가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등등. 특정한 최종 대상들의 모든 계열들 있으며, 이것이 통치 그 자체의 목표가 된다. 다양한 이들 최종 대상들을 획득하기 위하여 사물들이 배치(disposition)되어야 한다."(Foucault, 1992: 93-95)
이를 위해 국가는 특정한 경제정책이나 조치를 취하기도 하고, 농업보조금을 지불하기도 하며, 인구통제를 위한 정책을 실시하기도 한다. 유아사망률을 낮추기 위한 보조정책을 실시하기도 하며, 영세민에게 생활보조금을 주기도 한다. 정기적으로 통계를 수집하여 관리하고, 그 통계를 통해 국소적인 여러 생활영역에 개입하고 관여할 자료를 마련하고 적절한 개입의 방법을 고려한다. 물론 억압하고 국가적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그에 못지 않게 많지만, 새로운 통치의 영역은 점점 더 중요한 국가적 정치의 영역이 되었다. 이처럼 결국 '통치'란 미시적 대상을 국가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달리 말하면 국가적 권력이 개별화된 주체를, 그리고 그들을 생산하는 권력을 포섭하는 메카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연관해서 '치안'(police)은 여타의 국가기구와 함께 국가를 이끄는 행정기구로서 등장했는데, 어떤 영토에서 사람들의 공존상태, 재산에 대한 관계, 생산물, 시장에서의 일 등 살아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일과 그들의 질병 및 안전 등을 고려하여 활동한다. 요컨대 치안은 생활을 돌본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치안의 진정한 대상은 인간"이라고 간주된다(Foucault, 1988). 이로써 국가적 권력은 개인들의 생활과 생존, 안전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인정받게 되고, 역으로 치안은 사람들의 삶에 중앙집권화된 정치 행정권력이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새로운 장을 연다.
통치나 치안이라는 이러한 배치를 통해 국가는 개인의 삶과 생활에 대해 개별적으로 책임을 지며 돌보아야 하는 사목적(司牧的) 위치를 확보하게 되며, 그 댓가로 개인들의 삶을 국가적 권력 아래 포섭하고 관리하게 된다. 이제 국가가 개인의 생활에 개입하는 것은 사목적인 위치로 인해 당연한 것으로서 정당화되며, 반대로 국가적 권력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개인은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동사무소나 여러 국가기구들은 국민들의 신상과 이력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개별적인 파일로 만들어 관리한다. 양들을 돌보는 사목과 유사하게도 개개인을 돌보는 방식으로 관리하고 개입하는 국가적 권력이 작동한다. 이는 다양한 미시적 영역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과정에 국가가 개입하고 관리할 수 있는 고리들을 확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로써 통치적인 국가권력은 다른 영역들에서 작동하는 권력들에 대해 지속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를 권력관계의 국가화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권력관계가 한편으로는 국가의 통치적 권력에 집중되고 통합되었음을 뜻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각각의 권력관계가 국가적 제도의 형식 내지 그 후원 아래 정교화되고 합리화되었음을 뜻한다. 요컨대 푸코는 근대적인 국가권력가 "개별화하는 기술과 전체화하는 과정의 복합체"라고 말한다(Foucault, 1984: 304).
이에 대해 한편으로는 국가권력이 개개인을 국가에 대한 일종의 '채무자' 내지 의존자로 만들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 자신을 일종의 '채권자'로 만드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국가에 대한 조세는 단지 법적 의무의 형식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목적인' 통치와 치안을 위해 필요한 경제적 형식이다. 또한 국가가 발행하고 보증하는 화폐는 국가의 관리와 통치 능력을 기초지우며, 또한 반대로 그 능력에 의해 정당화된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이 잘 보여주듯이, 화폐의 발행, 특히 불환지폐의 발행이 사회 전반에 대한 착취 내지 포획의 경제적 방법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국가장치를 '포획장치'라고 정의한다(Deleuze & Guattari, 1987: 437 이하). 또한 네그리는 1929년 대공황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이러한 과정은 국가가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착취와 포획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경제적' 장치로 되었다고 말한다(Negri & Hardt, 1996, I: 96-107).
케인즈주의 내지 적극적 개입국가에 대해 '사회복지국가'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국가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개입과 관여를 개인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조건으로 개념화하기 시작했던 것은 네그리가 말한 그 시기 이후였지만, 이미 보았듯이 그 근본적인 장치는 오래 전에 통치와 치안, 사목적 국가라는 형태로 작동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것은 나름의 가치에 따라 판단하고, 고유한 삶의 방식을 변이시키며 새로운 삶의 양상을 생성하려는 힘과 의지를 포획하고 포섭하는 장치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푸코나 들뢰즈/가타리는 전쟁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정의를 뒤집어 이렇게 말한다: "정치란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의 계속이다."(Foucault, 1990: 107; Deleuze & Guattari, 1987: 421, 467)
이러한 개념을 통해 우리는 근대적인 정치 개념의 전제에 대한 탈근대주의적 비판을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주권의 위임과 양도에 따른 대의와 대행으로 정치를 정의하는 관념에 대한 비판. 그들에 따르면, 국가권력은 '국민'의 개별적인 생활을 고려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경우에도 결코 그들의 뜻을 대의하고 대행하지 않는다. 그러한 관리와 '고려'는 국가가 대중을 향해 방사(放射)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시적인 삶의 영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탈주적인 흐름을 포섭하고 포획하기 위한 것이고, 개개인을 채무자로 만들기 위한 기술이다. 그것은 각각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권력관계를 국가적으로 관리하고 집중.통합하기 위한 전략의 산물이다. 국가권력이 개인들의 의지를 대의하고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개인들이 국가권력의 의지를 대행하고 실행한다.
예컨대 권리나 권력이 위임되고 대의될 수 있다는 홉스의 주장은, 전쟁 같은 자연상태를 담보로 전제적 권력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권력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전쟁을 개념화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전쟁이라는 끔찍한 이미지를 통해 국가를 개념화한다. 이로써 전제적인 국가권력에 중립적인 조정자, 불가피한 관리자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위임이나 대의는 논증된 것이 아니라 전쟁상태라는 협박을 통해 도입된 것이다.
둘째, 이러한 대의와 대행을 입증하는 개념적이고 현실적인 매개가 '다수성'을 통해 정의되는 일반의지 내지 '보편성' 개념이다. 그러나 이런 보편성이나 일반의지가 다수성을 통해 표시되고 그것을 통해 대의와 대행이 가능하다는 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다수성을 보편성으로 치환하기 위해 흔히 끌어들이는 것이 이해관계나 욕구의 통일성이다. 그러나 이른바 '국민적인' 보편적 이해관계란, 근대비판가들이 보기에는 통치권을 이미 가진 국가, 사목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국가적 통치로부터 벗어날 경우 감수해야 할 손해의 짝(couple)이다. 근대 국가에서 보편적인 것이 있다면, 화폐나 자본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삶을 장악하는 힘이 강력한 것만큼, 사람들의 생각을 보편화하고, 사람들의 의지를 보편화한다. 이처럼 보편성이나 다수성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척도, 어떤 가치, 어떤 견해(이른바 '여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Deleuze & Guattari, 1987: 105). 이런 점에서 대의와 보편성은 개별화하는 동시에 전체화하는 권력이 작동시키는 범주지, 그것을 성립하게 해주는 범주는 아니다.
5.사회운동과 근대 정치
근대정치에 대한 탈근대주의자의 비판은 단지 근대 국가나 지배체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처음에 말했듯이 기존의 지배체제에 저항하고 그것을 전복하려는 사회운동 또한 겨냥하고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기존의 맑스주의 정치학에 관한 것이다.
기존의 맑스주의적 이론 안에서 운동은 착취를 통해 정의되고, 운동의 보편성은 착취의 보편성을 통해 정의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노동의 대립은 사회의 모든 영역들에 그 영향을 미친다. 가족제도와 가부장제, 여성의 억압, 주택문제, 환경문제 등등이 그것이다. 그런 만큼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복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반적 전복은 착취의 중심에 있으며, 가장 착취당하는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를 통해서 가능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해방을 통해 사회 전체를 해방시킬 수 있는 존재고, 이런 의미에서 보편적 계급이다. 뒤집어 말하면 모든 사회적 저항세력의 운동은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결합되고, 그것을 통해 총체화됨으로써만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지의 일상적인 지배와 억압, 이데올로기적 통제 등으로 인해 자신의 저 보편적 이해를 올바로 인식할 수 없다.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를 대변하고 그들의 의지를 대의하는 전위조직인 당에 의해 가능하다.
운동에 대한 이러한 관념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보편성과 총체성, 대의와 대행이라는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이 근대적 정치 개념의 근저에 있었던 것과 동일한 전제라는 것은 다시 말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지 개념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탈근대적 사상가들이 주목하는 것은 차라리 현실적인 문제요 운동에 관한 문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성과 총체성이라는 개념은 노동운동을 모든 사회운동의 중심에 설정하고, 그것에 여타 운동들을 통합할 수 있는 위상을 부여했다. 즉 어떠한 운동도 노동운동을 통해서만, 그것과 결합함으로써만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운동의 전체적 통합성을 확장하는 의미를 갖지만, 동시에 각각의 운동이 갖는, 노동자계급의 이해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성을 무시하거나 '정당한' 사회운동에서 배제하는 효과를 갖는 것이기도 했다(Laclau & Mouffe, 1990). 예를 들어 동성애운동처럼 노동자계급이 지지하지 않았던, 그러나 기존 체제에 대해 투쟁할 수밖에 없는 운동, 환경문제의 해결을 생산양식의 변혁으로 환원하거나 연기하길 거부하고 오히려 발전과 개발이라는 개념 전체에 대한 비판과 투쟁으로 정의하는 환경운동 등이 그렇다.
또한 전위조직이나 당이라는 조직에 의해 노동자 계급의 이해가 대변되고 대의될 수 있다는 관념은, 그것을 올바로 인식할 수 없는 노동자들의 자생적 위치, 당에 의해 올바른 계급의식을 대중에게 주입한다는 명제 등과 결합되어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노동자는 당이 대변하는 자신의 계급의식에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중요하며, 거기서 벗어나는 어떠한 저항이나 운동도 소부르주아적인 운동, 자생주의적인 운동으로 비판된다. 여기서도 노동자가 당이라는 전위조직의 의지와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대의와 대행의 실질적인 의미가 된다. 이런 점에서 당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켰던 노동자 대중이나 인민들이 비난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1953년 6월 17일 동베를린 노동자 봉기를 진압한 동독공산당은 당과 정부를 실망시킨 인민을 비난하면서 다시 당의 신뢰를 회복할 것을 촉구한 전단을 뿌렸다. 이를 두고 브레히트(B. Brecht)는 다음과 같이 풍자한 바 있다. "[그 전단에는] 인민들이 어리석게도/ 정부의 신뢰를 잃어버렸으니/ 그것은 오직 2배의 노동을 통해서만/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 씌여져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정부가 인민을 해산해 버리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욱 간단하지 않을까?"(<해결방법>) 사회주의에서 노동조합이나 대중조직을 당의 '전달벨트'로 정의했던 스탈린의 생각 역시 이와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한편 혁명이란 근본적으로 생산양식의 변혁이지만, 이는 일차적으로는 부르주아지로부터 기존의 국가권력을 탈취하여 장악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정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수립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부르주아지가 소유한 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으로 대체하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서 보았던 근대적 정치 내지 권력 개념과 동일한 전제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 우선 권력은 누군가에 의해, 즉 부르주아 계급이나 노동자 계급에 의해 소유되기도 하고 빼앗을 수도 있는 대상이라는 관념이 그것이다. 이것이 권력 내지 권리의 주체에 관한 근대적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다는 점은 굳이 부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정치 내지 권력의 문제를 다른 영역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국가적 영역으로 국지화함으로써 일상적인 세계, 공장이나 학교, 공장, 혹은 경제나 문화 등의 영역에서 분리하고 있다는 점 또한 동일한 양상으로 발견되는 근대적 관념이다.
반면 탈근대적 사상가들은 공장이나 학교는 물론 사회운동 내지 혁명운동을 수행하는 당이나 노동조합 등의 조직에서 이루어지는 활동 자체가 권력과 결부되어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공장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테일러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의 활동, 노동자들의 신체를 길들였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사회주의 노동자들을 길들이리라는 것이다(이진경, 1997: 300-321). 미세하게 분할된 동작, 시간적 규율, 관리자의 통제에 따른 동작의 반복 등. 이는 주어진 것만을 자신의 일로 하며, 명령에 따라 일하고 행동하는 습속을 생산하리라는 것이다. 테일러주의는 자본주의적 공장에서 작동하던 규율권력과 동형적인 권력이 사회주의 공장에서도 작동하리란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이러한 규율과 훈육, 강력하고 미세한 통제가 전위당 조직의 모델로 사용될 때, 조직활동 자체 역시 근대적 규율권력에 길든 활동가를 생산하리라는 것은 일찍이 로자 룩셈부르크가 지적한 바 있다(이에 대해서는 이진경, 1997: 258 이하 참조).
이처럼 권력 내지 그 권력이 작동하는 영역으로서 정치는 사회주의에서도 국가와 관련된 특정 영역으로 국지화되지 않고, 모든 일상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이 광대한 영역에서 근대적인 방식으로 행동하고 사고하는 습속을 전복하지 못하는 한, 정권의 교체는 이전의 지배적인 권력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지 못한다. 반대로 이전과 동일한, 관료화된 조직, 근대적 규율에 길든 대중이나 활동가, 노동자가 지속적으로 생산될 것이다. 요컨대 권력을 부르주아지로부터 탈취하여 노동자계급이 점유 내지 소유하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의미에서 혁명을 정의하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탈근대적 사상가들은 새로운 정치학을 구상하고 제안하는 셈이다. 이는 어떤 하나의 조직, 하나의 방향, 하나의 운동으로 다양한 운동들을 총체화하고 동질화하는 정치와 반대로, 차이를 차이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하며, 이질성이 공존할 수 있게 하는 정치라는 점에서 흔히 '차이의 정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물론 이 이름 또한 그 안에 존재하는 입장들의 다기한 차이를 제거해선 곤란하다. 마지막으로 이 차이의 정치학들이 취하는 상이한 양상들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입론들을 통해 검토해 보자.
6.차이의 정치학들
논자에 따라 적지 않은 편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근대적 정치학들이 명시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이상과 같이 근대적 정치 관념에 대해 거리를 두고 비판한다는 것은 크게 보아 공통된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철학적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타자'(the others)를 억압하는 동일자(the Same)의 논리, 차이(difference)를 제거하거나 억압 내지 봉합하는 '동일성(identity)의 정치'를 겨냥하고 있다. 다양한 영역에서 작동하는 미시적인 권력들은 배제되어야 할 어떤 것--타자--을 통해 정상성의 범위를 구획하며,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어김없이 두터운 벽으로 둘러싸인 타자의 세계로 추방한다. '문둥이', 광인, 무신론자, 부랑자, 변태, 동성애자, 색광증 환자...... 그리고 그것은 각각의 영역 안에 존재하는 모든 활동이나 사고, 행동을 일정한 권력의 도식에 의해 동일화하며, 그것에 포섭되는 않는 행동, 그렇게 형성된 동일성에 거리를 두려는 자들을 추방한다. 그리고 그 미시적 권력들을 기초짓는 한편 그것을 집중화하고 전체화하는 국가권력은 그 동일성에 사회적 보편성의 위상을 부여하며, 그것을 다수적인 것으로 만들어낸다. 하버마스 같은 근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사회적 '합의'란 보편성을 다시 복원하려는 말이다. 그가 애써 지키자고 말하는 규범이나 규칙, 법 등은 국가권력이 이른바 '사회적 합의'와 동일성을 다수성으로 만들어내는 장치의 일부일 뿐이다(이에 대한 비판은 Ryan, 1996: 55 이하 참조).
이와 대비해 탈근대적 정치학은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의 고유성을 강조한다. 다양한 사유와 활동의 흐름을 동일화시키려는 동일자의 논리, 동일화하는 권력에 반대하여 차이를 보호하거나 새로이 생성시키려 한다. 이런 점에서 이들이 제시하는 정치학을 '차이의 정치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도 입장의 차이가 있는데, 차이의 정치학으로 묶일 수 있는 입장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차이의 승인으로서 차이의 정치학. 이 입장을 명시적으로 제시한 것은 헤겔 연구로 알려진 해석학자 찰스 테일러(C. Taylor)다. 그는 해석학자가 대개 그렇듯이 탈근대주의와는 전혀 상반되는 입장을 갖고 있기에 지금의 주제에서 벗어나 있지만, 차이의 정치학을 그들조차 '승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징후적인 의미를 갖는다. 동시에 이는 그들이 허용할 수 있는 차이 개념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기에 간단히 다루어 볼 만 하다.
해석학에서 말하는 차이는 무엇보다도 한 사회 안에서는 시간적 차이고, 상이한 사회간에는 지평의 차이인데, 이는 모두 '전통'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전통이란 사회마다 다르고(different) 사회 안에서도 시간적으로 달라서, 어떤 단일한 보편성에 의해 비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즉 역사적으로 형성된 어떤 전통을 혁명이나 사회주의 같은 초월적 기준에 의해 비판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해석학자인 가다머(H-G. Gadamer)가 보수주의자로 분류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Warnke, 1993).
테일러는 조금 달라서 보편주의 아래서 억압되고 오인되는 차이적 요소들을 지적하고 인정한다. 흔히 그러하듯이 자신이 선 문화와 전통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착각하고, 그에 따라 다른 문화들을 비난하고 억압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를 들면 개를 먹는 한국의 문화를 야만적이라고 비난하는 서구의 동물애호가들이 그렇고, '식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것을 비난하는 서구나 우리 역시 그렇다. 그는 이러한 문화적인 차이들이 차이로서 인정되고 승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차이의 정치란 이처럼 "보편적으로 공유되지 않은 어떤 것을 승인하고 지위를 부여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Taylor, 1996). 그런데 테일러는 보편주의적 태도를 거부하지만, 차이를 이처럼 승인하기 위해선 모든 문화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최소한의 신념적 토대가 공유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그는 "각각의 특수한 것을 승인함으로써 결국 우리는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고 말함으로써 차이의 정치가 사실은 보편성에 관한 모종의 개념에 기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가 말하는 '차이'가 단지 인정 내지 승인에 의해 보존되어야 할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보존이라는 관념, 근본에서 보면 보수적이라고 할 관념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고병권, 1997).
둘째, 분쟁(diff rend)을 통한 차이의 정치.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을 일반화하여 유행시켰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 철학자 료타르(J-F. Lotard)의 입장이다. 그는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을 끌어들여 {포스트모던 조건}에서 하나의 거대한 이론으로 통일되거나 총체화될 수 없는 국지적이고 다양한 '언어게임'에 대해 강조한 바 있다(Lyotard, 1992).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어떤 말의 의미는 그것의 용법이다. 용법은 삶의 형식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Wittgenstein, 1994). 예를 들어 말콤 엑스가 사전에서 찾은 'black'이라는 단어는 뉴욕의 슬럼 주변에서는 '검둥이'라는 경멸적인 의미를 갖지만, 화실에서는 단지 무채색으로 '검정색'을 의미하고, 신학적으로는 빛의 밝음과 대비되는 어둠이요 암흑이다. 즉 하나의 동일한 단어가 상이하게 사용되고, 그에 따라 상이한 의미를 갖는다. 말하는 어법이나 어조, 문장을 구성하는 규칙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강의실과 술집, 가정에서 동일한 어법, 동일한 어조로 동일한 문장을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언어능력은 상당히 심각한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해야 한다.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언어게임과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언어게임, 관청에서 이루어지는 언어게임은 어떤 단일한 보편적 원리나 규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를 갖는다.
그러나 마치 표준어가 사투리들을 통합시키고 억압하듯이, 지배적인 규칙은 그렇지 못한 언어게임을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한다. 그리고 그 지배적인 규칙에 따라 보편화하려고 한다. 이는 언어만이 아니라 입장이나 이해, 태도, 삶의 방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약자, 소수자들의 입장이나 삶의 방식은 억압되고 짓눌린다. 자본의 논리 아래 노동자의 목소리는 눌리고 묻힌다. 료타르는 보편성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통합과 총체화에 반대하여, 자신의 목소리, 자기의 삶의 방식, 자기의 입장을 드러내고 충돌하며 '분쟁'을 벌이자고 주장한다(Lyotard, 1988). 특히 그가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자본의 지배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다(Wilke, 1992: 197). 분쟁은 동일자에 억압된 타자의 목소리를 소리나게 하는 것이고, 총체성, 통일성에 가려진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분쟁의 전략은 차이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차이의 정치를 추구하는 셈이다.
셋째, 탈주 혹은 차이의 생성으로서 차이의 정치. 이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취하는 입장이다. 니체에 따르면 '차이'는 무엇보다도 긍정과 생성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생성하는 것, 그것은 기존의 것이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변이'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차이의 생성 내지 다른-것이-되기로서 차이의 정치는 차이의 승인이나 인정과 다르고, 은폐되고 억압된 차이를 드러내는 것과도 다르다. 그것은 동일성을 강제하는 기존의 체제 안에서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지배적인 가치나 삶의 방식, 지배적인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변이, 다른 것,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을 그들은 '탈주'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그 지배적인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 새로운 활동,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창조하는 긍정적인 것이고, 이로써 지배적인 체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기존의 체제를 변환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동일성에 사로잡히거나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그들은 '유목'(nomad)이라고 부른다(Deleuze & Guattari, 1987: 351 이하).
이는 단지 미시적인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미시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고 영향을 받는다고 본다. 예컨대 정신분열증이나 신경증은 물론 특정한 양상의 얼굴, 학교나 공장에서 반복적으로 길들여지는 시간적 리듬감조차 모두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신체적 무의식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다(Guattari, 1998). 이 모든 것들에는 국가가 전제가 된다. 스톡(stock)과 잉여가치의 포획을 통해 발생하고 작동하는 국가장치는 그러한 경직된 선들로 구성된 거대 체제를 이룬다(Deleuze & Guattari, 1987: 437 이하). 국가장치와 반대편에는 '전쟁기계'가 있다. 여기서 왜 '전쟁'이나 '기계'라는 말을 쓰는지는 간단히 설명하기 곤란한데, 다만 전쟁기계는 자유로운 생성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조직을 지칭하며 국가적 포섭 내지 국가화 경향에 대해 반하여 활동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혁명정당이나 자주관리 조직, 코뮨적인 조직 등이 그것이다. 이는 차이의 생성으로서 차이의 정치학이 구체적으로 작동하는데 실질적으로 중심적인 조건이다.
넷째, 새로운 주체의 생성 혹은 '주체화'로서 차이의 정치. 이는 푸코나 네그리 같은 사람이 강조하는 것인데, 차이를 승인이나 드러냄의 문제가 아니라 생성하는 것의 문제라고 본다는 점에서는 들뢰즈/가타리와 유사하다. 다만 그것을 자본주의 내지 근대적 권력이 생산하는 것과는 다른(different) 주체성의 형성으로 이해한다.
네그리나 들뢰즈/가타리와 마찬가지로, 푸코에게 근대적 주체란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적 권력이 신체적으로 작동한 결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의학이나 교육학, 범죄학 등과 같은 담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병원이나 학교, 법정이나 감옥 등과 같은 '물질적' 장치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푸코는 이런 점에서 권력이 없다면 어떠한 주체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근대적 체제에 특징적인 것은 체제가 정의하고 부과하는 '보편적' 권력 도식을 수용하고 그에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주체가 생산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푸코는 다른 종류의 주체화가 가능하며 필요하다고 본다. 근대적 주체, 그런 주체의 동일성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주체,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주체성을 생성하는 것(Deleuze, 1993: 105). 그러나 푸코도 말했듯이, 자기에 대한 배려는 언제나 타인에 대한 배려, 타자에 대한 배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가 말하는 새로운 주체성이란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집합적인 것, 코뮨적인 것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네그리는 새로운 주체성을 코뮨적 주체성이라고 명시적으로 강조한다. 그는 정보와 통신, 자동화 등으로 인해 생산과 소통의 양상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고 보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와 유사하다. 그러나 그것이 가진 잠재력은 자본에 의해 공장을 넘어 전사회적인 착취에 이용되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자율성과 집합적 다양성을 자본주의적 총체성으로 포섭한다고 한다. 자본에 의한 포섭과 자본주의적 주체화를 가로질러서, 새로운 집합적 주체성을 생산하는 것, 코뮨적인 주체성을 구성하는 것이 네그리의 중요한 전략이다(Negri, 1989; 윤수종, 1997). 이는 자본주의적 주체성에 대비되는 것이지만,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동일한 양상의 주체, 그런 주체의 통일성에서 벗어나 다른 종류의 주체성을 생성하려는 것이란 점에서 푸코와 유사성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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