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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화과정과 정치적-이념적 지형의 변화
- '보수 대 진보' 관계 변화를 중심으로 -
김세균
들어가면서
1987년 6월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투쟁은 한국의 민주화과정의 진정한 출발점을 이룬다. 그 이유는 그 이전의 시기가 '비민주주의적 국가체제의 위기 속에서의 유지-재강화과정'으로 특징져 진다면, 그 이후의 시기는 '비민주적 국가체제의 민주적 국가체제로의 이행'에 의해 특징져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1987년 6월 투쟁 이후의 한국의 사회발전과정은 민주화과정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민주화과정이 사회구조 전반의 신자유주의적 개편과정과 중첩된 것에 의해 특징져진다. 때문에 우리는 민주화와 신자유주의화의 관계에 대해 질문해야 하며, 그러한 중첩에 의해 한국의 보수와 진보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아울러 구명해 보아야 한다. 민주화과정은 동시에 한미관계와 남북한관계 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때문에 1987년 6월 투쟁 이후 대미관계와 대북관계 문제에 대해 보수와 진보가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 가 역시 구명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파악의 기초 위에서 우리는 결론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관계 변화의 방향을 전망해 보려고 한다.
1.1987년 6월 투쟁 이전까지의 한국의 국가체제와 이념적-정치적 지형
1.1. 국가체제의 변화과정
1987년 6월 투쟁 이전까지 한국의 국가체제는 - 1960년 4월 혁명이후부터 1961년 5.16 군사구테타 이전까지라는 짧은 시기를 제외한다면 - 크게 보아 파시즘체제의 성격을 지녔었다. 이때 이승만정권 하의 국가체제가 '(초기적 형태의) 민간파시즘체제'로 규정될 수 있다면, 박정희정권 하의 국가체제는 '군부파시즘체제'로 규정될 수 있다. 그리고 '국가레짐' 수준에서 이승만정권 하의 국가체제는 '민중배제적-대미의존적 국가체제' 등으로 규정될 수 있다면, 박정희정권 하의 국가체제는 '개발독재체제' 내지 '발전국가' 또는 '국가주의적 발전동원체제' 등으로 규정될 수 있다.
파시즘체제 하에서 국가는 일반적으로 자본축적을 적나라한 정치적 도구로 기능한다. 그런 가운데 이 체제 하에서는 시민적-민중적 제반 권리들이 유보되고 집권세력과 국가권력이 직접적으로 융합하는 가운데 집권세력 이외의 정치세력의 자유로운 정치활동이 금지되며, 국민의 사회적 삶 전체가 국가의 억압적 감시와 통제 하에 놓이게 된다. 그런 공통된 특징들을 지닌 가운데에서도 이승만정권 시기와 제3공화국 출범부터 유신체제 성립 이전까지의 국가체제는 이념적 성격에서는 집권세력과 커다란 차이가 없었지만 권력투쟁에서 정권으로부터 배제된 반정부세력이 제도정치 영역에서 활동할 자유를 일정하게 보장하는 체제였다면, 유신체제 성립이후부터 전두환정권까지의 국가체제는 이들 세력들조차 제도정치 영역으로부터 거의 완벽하게 추방한 체제의 성격을 지닌다. 국가가 그러한 파시즘체제로 기능하는 가운데 한국의 자본주의는 자본원조경제체제에 기생하면서 관료들과의 결탁과 민중수탈에 기초하여 부를 축적한 종속적 관료자본주의체제가 관료독점자본주의체제로 변하고, 이 체제가 다시 1970년대를 거치면서 자기 자신의 산업적 축적기반을 구축한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로 변모했다. 위에서의 논의와 관련하여 다음의 점들이 지적될 수 있다.
첫째, 어떤 체제가 파시즘체제인가 아닌가를 판명하는 기준은 무엇보다 국가체체가 피지배대중의 시민적-민중적 권리를 보장하는 가 아닌가와 , 그 국가가 독점자본주의의 발전에 대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가이다. 이승만정권은 전 국민에 대한 총체적인 감시체제를 수립하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형애화시켰으며, 관료자본의 관료독점자본으로의 발전 및 노동자-민중에 대한 관료독점자본의 대규모적인 수탈을 뒷받침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정권은 일종의 '초기적 형태의 민간파시즘 정권'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파시즘체제를 '국가와 시민사회의 대당론'의 관점에서 '과대성장국가' 등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둘째, 1960년의 4월 혁명은 학생층이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도시의 서민층을 형성한 도시 소부르주아층과 빈민층이 대거 가담함으로써 폭발했다. 4월 혁명은 원조의 삭감이 가져온 경제위기의 가중이 배경을 이루는 가운데 직접적으로는 부정선거 실시가 불을 붙인 이승만정권에 대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성격을 지녔었다. 그러나 저항을 폭발적인 것으로 만들어 낸 기본적인 원동력은 민중수탈적인 관료독점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민중의 분노였다.
셋째, 4월 혁명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민중수탈적인 관료독점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민중의 분노였기 때문에, 4월 혁명 이후 저항운동의 전개양상은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그러한 관료독점자본주의적 발전을 가져온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4월 혁명의 성과로서 정치적 민주주의가 대폭적으로 확대되었지만, 그러한 조건 속에서 정치를 주도하게 된 의회부르주아세력은 그러한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능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4월 혁명 이후의 정세는 '의회부르주아세력의 아직 통치능력 없음'과 '(지배세력으로 상승함에 있어) 저항세력의 아직 능력 없음'에 의해 특징져 졌는데, 이러한 형세의 조성이 이후 군부정권이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해 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4월 혁명으로부터 5.16 군사구테타에 이르는 시기를 관료독점자본주의체제의 위기와 초기적 파시즘체제의 붕괴에 따른 체제위기의 시기로 규정내릴 수 있다.
넷째, 군부세력을 새로운 주도적인 통치세력으로 등장시킨 1961년 5.16 군사쿠데타는 위에서 말한 위기를 파시즘적으로 해결하고, 점차 세를 불리고 있었던 저항세력이 가하는 위협이 체제에 대한 현실적인 위협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예방적 반혁명'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다섯째, 한국사회는 군부정권 하에서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국가가 자본축적을 위한 적나라한 도구가 되는 가운데 고도의 노동자 착취를 수반한 산업화과정은 비록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 기반을 둔 것이지만 이전과 비교해 훨씬 강력한 물질적 기반을 지니게 된 독점자본을 출현시켰다. 이 과정은 동시에 생산과정에서의 잉여가치의 생산이 자본축적과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증대시킴으로써 이전의 '관료독점자본주의체제'를 '(아직 그 물질적-계급적 기반이 성숙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초기적 형태라 할 수 있는)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로 변모시켰다. 이 과정에서 유신체제 성립 이전의 박정희체제는 관료독점자본주의를 초기적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이행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수행했다. 이 체제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요소가 일정하게 가미된 (이전 보다 강화된 자신의 물질적-계급적 기반을 지닌) 군부파시즘체제로서 규정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본격적인 산업화가 이루어진 1960년대를 '파시즘적 관료독점자본주의체제의 (초기적 형태의) 파시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로의 이행기'로 규정할 수 있다.
여섯째, '유신체제'는 한편으로는 군부세력이 자신의 집권을 영구화하기 위한 시도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군부파시즘체제에 대한 저항의 증가를 파시즘의 더 한층의 강화를 통해 해결하고, 자신의 물질적 기반을 주로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에 두고 있었던 초기적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를 보다 강력한 물질적 기반을 지닌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로 발전시킬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을 창출하기 위한, 또 하나의 '예방적 반혁명'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유신체제를 '한국의 종속적 군부파시즘의 완성된 형태'로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중반이후부터 한국에서는 '중화학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한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는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에 걸 맞는 물질적 기반을 지니게 되며, 독점자본의 경제적 지배력 역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증대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유신체제하의 시기를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가 정착한 시기로서 규정할 수 있다.
일곱째, 유신체제의 말기에 이르면 한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가 처음으로 중대한 축적위기에 빠져들었으며, 핵무기 개발문제 등으로 미국과 박정희정권과의 관계 역시 악화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박정희정권에 대한 저항 역시 크게 증대했는데, 1979년의 10.26 사태는 그러한 저항이 보다 큰 저항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한, 군부세력 내부의 소수 온건파들이 주도한 일종의 예방적 조치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1980년의 5.17 비상계엄령 선포 등은 무엇보다 박정희의 암살이 가져온 군부파시즘체제의 위기를 파시즘의 재강화를 통해 폭력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강경군부세력 주도 하의 최후의 반혁명이었다. 이 반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미국이 기존의 데탕트정책을 버리고 신냉전정책을 취하면서 제3세계의 군부세력들을 지지하기 시작한 점, 그리고 자유부르주아 야당세력이 선거혁명의 환상에 사로잡혀 군부파시즘에 대항하는 투쟁에 일정한 거리를 취한 점 등도 크게 작용했다.
광주민중항쟁의 유혈적 진압 등을 통해 수립된 전두환체제는 기업의 대대적인 통-폐합과 같은 본격적인 산업구조조정에 착수하고 노동자-민중에 대한 착취와 수탈을 더 한층 강화하는 것을 통해 한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가 처음으로 맞이한 구조적 위기를 (파시즘적 방식으로) 극복해 나갔다. 그런데 전두환정권이 행한 산업구조조정정책에는 '민간경제 주도체제로의 이행 프로그램'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추진은 국가주의적 성장정책을 기본적으로 추진하는 가운데에서도 최초로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도입시켰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1.2. 정치적-이념적 지형의 변화과정
1987년 6월 투쟁 이전의 한국의 정치적-이념적 지형의 변화과정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첫째,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대한민국의 수립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좌파세력 및 기층민중세력이 인신적으로 거의 섬멸 당했으며, 한국사회는 자본주의적 발전 이외의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을 선택할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사회로 변모했다. 이와 함께 한국사회는 남북대결구조의 재생산과 파시즘체제의 수립 등에 힘입어 '반북-반공 이데올로기'가 국민다수에게 '의사합의적' 수준의 내면화된 이데올로기로까지 전화한 '반공규율사회'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은 대체로 '국가적 폭력에 의한 공포' 와 '공포를 통한 지배이데올로기의 강제'가 피지배대중의 '자포자기적 순응'과 '방어적-수동적 순응'을 가져오고, 그러한 순응이 이후 상당한 수준까지 알뛰세르가 말한 '신체화된 무의식' 내지 푸코가 말한 '생체권력화된' 힘으로 전화되어 간 과정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아울러 파시즘체제 하에서 한국의 이념적 지형은 '친미주의'와 부차적으로는 '반일주의' 등이 '반북-반공주의'를 보완하는 가장 중요한 지배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해 왔다. 다른 한편, 1960년대부터 차관도입과 수출제일주의정책에 기초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러한 산업화를 옹호하는 이른바 '근대화(내지 발전)이데올로기'가 적어도 1970년대 초까지는 많은 대중들의 능동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적극적 지배이데올로기로서 기능했다.
한국의 파시즘체제는 북한과의 대결과 한국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등으로 인해 - '한국적 민주주의'를 제창한 유신체제 등을 예외로 한다면 - 다른 어떤 파시즘체제보다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앞세운 체제의 성격을 지녔었다. 때문에 한국의 파시즘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억압한 체제'의 성격을 지녔으며, 반공주의의 역시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수호'를 위한 불가피한 요구로서 자신을 정당화해 왔다. 이로 인해 한국의 경우 파시즘세력 대 자유민주주의세력 간의 투쟁은 많은 경우 '누가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옹호자인가'를 둘러싼 투쟁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나아가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를 부치긴 했지만 유신체제조차 자신을 민주주의로서 정당화한 것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특정 체제의 내용 부여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지배이데올로기가 되도록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둘째, 파시즘체제 하에서 지배블록은 국가권력과 융합한 집권세력과 이들과 결탁해 부을 축적하는 자본가세력 및 파시즘적-자본주의적 발전을 옹호하는 제 사회지배층으로 구성된다. 때문에 이 체제 하에서는 자유민주주의세력도 지배블록의 성원에서 배제된다.
한국에서 파시즘적 지배블록은 이승만 시대에는 일제시대의 친일세력이, 군부정권 시대에는 군부세력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이들 세력의 이념적 성향은 기본적으로 '반자유주의적'이었다. 한편, 한국이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게 된 사정을 반영하여 미국에서 활동하거나 미국으로 유학 갔던 사람들이 지배블록을 충원하는 중요한 보급원이 되었다. 이들 중 많은 이들은 미국이 자유주의국가라는 점에서 이념적으로 많든 적든 '자유주의적으로 정향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의 자유주의세력은 '반공의 우선성', '근대화의 시급성' 등을 내세워 파시즘에 협력한 '반민주적 자유주의세력'과, 파시즘에 대항한 '반독재 자유주의세력' 내지 '자유민주주의세력'으로 분화되어 갔다고 하겠다. 그런데 당시 파시즘에 협력했던 반민주적 자유주의세력이 자유주의세력의 다수파를 차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 반민주적 자유주의세력은 이후 한국 보수세력의 중요한 한 기둥을 형성하게 된다.다른 한편, 자유주의세력은 파시즘세력이 자신을 배제하는 한에서는 그들과 투쟁했지만, 그들이 양보책을 강구하면 항상 그들과 타협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때문에 자유주의세력이 기층민중세력 등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함께할 때에도 이들과 완전히 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의 파시즘체제 하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 근대화이데올로기 등에 포섭된 대중이 파시즘적 지배불록의 수동적 또는 능동적 지지층으로 기능했다.
셋째, 좌파세력과 기층민중세력의 섬멸과 반공규율사회 및 파시즘체제의 성립은 체제에 대한 사소한 불평과 자신의 권익을 찾기 위한 기층민중의 조그마한 움직임조차 불온한 것으로 배척당하고 탄압받는 사회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이런 시스템의 작동은 애초에 기층민중의 정치적 수동화와 무력화를 극단적으로 진척시켰는데, 이는 다시 민중 자신의 조직화와 민중운동의 성장을 지속적으로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기층민중들은 그들 자신의 요구를 야당이나 학생들에게 대행시켜 실현시키거나 야당탄압이나 학생궐기에 의해 매개되어서야 비로서 자신을 능동화시킬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를 들어 4월 혁명이 고등학생들의 궐기 대학생들의 궐기 민중참여의 순서로 이루어진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중운동 전개의 역사적 조건과 관련하여 아울러 지적되어야 할 점은 남북대결구조 속에서 지배질서를 안정시키고 자본축적의 내국적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미국의 영향 아래 행해진 위로부터의 토지 개혁이 농민층을 정치적으로 보수화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원조경제 및 자본에 의한 민중수탈의 최대 희생자였던 농민이 더 한층 정치적으로 수동화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는 민중투쟁의 중심지역이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이미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이전되었다. 경제적 수탈에 반대하는 조직적 농민운동은 생존과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한 농민들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경제적으로 끊임없이 몰락시킨 민중수탈적 자본축적의 피해를 그들이 더 이상 감내하기가 어렵게 된 7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태동하기에 이른다. 이런 사실들과 관련하여 우리는 한국 기층민중운동 내지 한국 노동자-민중운동의 '때늦은 개화'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정권과 자본에 대해 자립성을 지닌 '민주노동운동' 및 농민운동을 비롯한 기층민중운동이 오랜 기간의 동면을 깨고 새롭게 태동하는 것은 군부정권이 강행한 민중배제적 산업화의 문제점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이다.
1970년대 이르면 그간 노동집약적이고 저임금-장시간노동 속에서 초과착취를 당해온 수출산업 부분의 여성노동자층을 중심으로 하여 자신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노동운동과, 파시즘적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의 또 하나의 심대한 피해층인 농민층이 전개하는 농민운동 등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영세사업장의 열악한 근로조건에 항의하여 행한 1970년의 서울 평화시장 근로자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새로운 민주노동운동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1970년대 중반 이후에 새로운 민주노조들이 대거 출현한 것은 그러한 운동의 중요한 성과였다. 특히 1979년의 YH 여공들의 야당당사 점거농성은 유신체제 몰락의 직접적인 도화선을 제공해 준 사건이었다. 이 시기의 이런 운동들은 비록 매우 초보적 수준의 계급적 권익옹호운동이었지만 노동자-민중이 처음으로 자신의 오랜 수동성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한 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넷째, 제도정치권에서 정치활동의 자유를 누린 야당세력이 반독재투쟁을 적극 조직하지 못하고 기층민중의 정치적 수동화와 무력화가 크게 진척된 조건 속에서 저항운동의 조직화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청년-학생층이었다. 청년-학생운동은 애초에는 크게 보아 '학원의 자유를 위한 투쟁'과 그 연장선상에서 행한 '정치적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한 투쟁' 이상의 것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유신체제의 성립과 더불어 국가의 강권적 탄압이 일상화되고 일체의 정치적 자유가 말살된 조건 속에서 청년-학생운동은 유신체제와 정면으로 맞서는 비합법적인 반체제운동으로 발전했다. 나아가 노동자-민중투쟁의 출현 등에 영향을 받아 고도로 민중착취적이고 민중수탈적인 한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와 유신체제와의 밀접한 관련성이 인식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청년-학생들의 반독재민주화투쟁은 이후 점차 '민중주의적 경향성'을 지닌 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발전은 청년-학생운동이 이후 한국사회의 보다 발본적인 변혁을 지향하는 운동으로 출현할 수 있는 전제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유신체제의 수립은 제도정치영역에서 일정한 활동의 자유를 누린 야당세력을 '비제도적 야당세력'으로 전락시켰다. 이 과정은 동시에 이들 비제도적 야당세력을 더한층 '반독재 자유주의세력'으로 전화시키고, 재야민주화세력과의 결합을 촉진시키는 과정을 동반했다. 그러나 이 결합은 크게 보아 명망가들로 구성되고 자유주의적으로 정향되어 있었던 재야민주화세력의 상층부분과의 결합 이상의 것이 되지 못했다.
다섯째, 유신체제 말기에 더 한층 강화되기 시작한 제반 저항운동은 1980년대 초 신군부세력의 등장과 전두환정권의 수립과 더불어 다시 한번 철퇴를 맞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면 근대화이데올로기가 경제개발의 성과가 소수재벌에게로 집중되고 있는 현실 앞에서 대중적 호소력을 크게 상실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광주민중항쟁의 효과로서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반독재민주화운동이 급속히 자신의 전열을 다시 가다 담을 수 있었다. 이런 정세에 힘입어 198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노동운동을 비롯한 기층민중운동 역시 자신의 힘을 급속하게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청년-학생세력 역시 광주민중항쟁이 무참하게 유혈 진압된 사태에 자극받아 더한층 급진화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사회의 발본적인 변혁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변모해 갔다. 청년-학생세력은 이후 크게 보아 일제시대의 민족해방운동 및 한국전쟁 이후에도 일정하게 명맥을 유지해 온 '민족해방주의적 운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반제운동 및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통일운동을 중시하는 '민족해방(NL)파'와, 그간의 한국사회의 산업화과정이 가져온 계급모순의 해결을 중시하는 '인민민주(PD)파'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이때 청년-학생운동의 주류적 흐름을 대변한 NL파는 '민주대연합'의 유지를 중시해 김대중세력으로 대표되는 자유부르주아세력에 대한 '비판적 지지'노선을 견지한 반면, PD파는 변혁세력의 독자적 세력화와 노동자-민중 헤게모니에 의한 자유부르주아지의 헤게모니의 대체를 주장했다. 그러나 NL파이든 PD파이든 변혁운동의 중심은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기층민중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인식을 같이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노학연대'를 추진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들 중 많은 부분은 198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자신을 노동운동활동가로 변신시켜 나갔다. 198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노동운동 역시 합법적 노조운동의 공간이 부여되지 못하고, '학출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을 주도한 데에 영향을 받아 '변혁지향적 노동운동'으로 급격히 변모하기 시작했다. 85년 6월 구로지역의 9개 노조가 국가의 민주노조 압살정책에 항의하여 전개한 노동자연대파업은 80년대 전반기 노동운동의 집약적 결실이자 그러한 변혁적 노동운동의 기념비적 투쟁이었다. 그리고 야당이 개헌을 위한 캠페인의 일부로 평화적 대중집회로 계획했던 것을, 청년-학생단체들과 노동운동단체들이 전투적 대중시위로 전환시킴으로써 발생한 1986년의 '5.3. 인천사태'는 변혁적 노동운동 및 노동운동과 융합한 청년-학생운동의 괄목할만한 성장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의 노동운동은 국가의 억압적 통제가 집중되었던 대기업소속 노동자들이 폭넓게 참여하는 수준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한 가운데 청년-학생들이 노동자로 대거 취업한 중소사업장의 남성노동자층에 의해 주도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여섯째, 전두환정권 하에서 한국의 저항운동은 제도정치권에서 밀려난 야당세력과 이들 야당세력과 결합한 재야민주화세력 상층부로 대변되는 '자유주의세력'과, 청년-학생운동과 노동자-민중운동으로 대변되는 '변혁적 (내지 변혁지향적) 진보세력'으로 분화되어 갔다. 그러나 군부파시즘체제 하에서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쟁취 없이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어떤 운동도 진척되기 어려운 조건에 놓이게 된다. 이런 사정을 반영하여 모든 저항운동들은 '민주주의 쟁취'를 최우선 과제로 상정하는 가운데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전개를 위해 자신의 역량을 집중시켰다. 이 과정에서 위에서 말한 양대 민주화세력은 파시즘체제에 맞서는 '범민주연합전선'을 형성했는데, 이 범민주연합전선은 다수 국민대중을 자신의 주위로 집결시키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전선의 상층부는 야당세력과 야당에 동조적인 재야인사들이 차지했지만, 이 연합전선의 주력부대는 청년-학생세력이었다. 변혁적 진보세력은 그러나 전두환정권 말기에 이르러 괄목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자유주의세력을 대신하여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대외적 주도권과 대국민적 헤게모니를 장악할 정도로까지는 성장하지 못했다. 이 사정은 이후 한국의 민주화과정이 자유주의세력의 헤게모니 하에서 파시즘세력과의 타협에 의해 진척되도록 만든 객관적 조건을 조성했다. 1987년 6월 투쟁에는 산업화의 진척과 더불어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한 신중간층 역시 대거 참여했는데, 당시 '넥타이부대'라고 불리기도 한 이들 신중간층이 민주화운동에 대거 참여한 것은 6월투쟁이 처음이었다. 이 신중간층은 6월 투쟁 이후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한 (뿌디)부르주아적 '시민운동'의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 된다.
위에서 우리는 파시즘체제 하에서는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가 다른 모든 대립구도를 가로지르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대립구도로 등장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때문에 파시즘체제 하에서 '민주 대 반민주' 대립구도는 곧 '보수 대 진보' 대립구도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2. 1987년 6월 투쟁 이후의 민주화과정과 정치적-이념적 지형변화
2.1. 민주화의 진전
1987년 6월의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투쟁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수립된 군부정권을 즉각적으로 퇴진시키지는 못했지만, 군부세력의 퇴진과 민주화가 더 이상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임을 입증해 주었다. 6월 투쟁에 힘입어 국민의 직접-보통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이 가능해지고, 합법적 정치공간이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개정된 헌법 하에서 치러진 1987년 12월의 13대 대선에서는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과 김영삼의 분열로 말미암아 여당후보로 나온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으로 군부세력의 집권은 사실상 연장될 수 있었다. 그러나 노태우가 38%라는 낮은 지지율로 당선된 데에서도 드러나다시피, 노태우정권은 집권기간 내내 '정통성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에 집권세력은 90년 2월 '3당 통합'을 단행, 과거에 유신체제를 뒷받침한 김종필세력과 함께 자유주의세력의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분파였던 김영삼세력을 여권진영으로 끌어들였다. 1992년 12월의 14대 대선에서는 여당후보로 나온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김영삼정권은, 비록 김영삼이 이전의 파시즘세력과 손잡아 대통령에 당선되긴 했지만, 1960년 이래 처음으로 수립된 '문민정부'(the civil government)라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 정권이었다. 더욱이 집권한 김영삼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도록 도운 군부세력의 정치개입에 쐐기를 박음으로써 '정치의 문민화'에 앞장섰다. 1997년 12월 치루어진 15대 대선에서는 김영삼정권의 실정과 한국을 IMF 관리체제 하에 놓이게 한 외환-금융위기의 발생 등에 힘입어 야당후보로 나온 김대중이 당선되었다. 김대중은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김영삼 정권 하에서 축출 당했던 김종필세력과 손을 잡았었다. 이 점에서 김대중의 당선은 (민주적) 자유주의세력의 온전한 승리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로 자처하는 김대중정권의 출범은 1960년 이래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화과정을 한층 더 진척시키는 것이었다. 김대중정권 하에서는 이전에 불법 활동으로 탄압 받는 '민주노총'과 '전교조'와 같은 주요 사회단체들의 활동이 합법화되고,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의 폭이 한층 더 확대되었다. 이어 2002년 16대 대선에서 이른바 '국민경선과정'을 거쳐 여당후보가 된 노무현이 당선된 것은 1987년 12월의 13대 대선부터 시작된 이른바 '선거혁명'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하는 사건이었다. 그의 당선은 재벌 출신의 정몽준과의 '선거연합'을 추진하고, 정몽준의 지지철회에도 불구하고 정몽준 지지세력이 이회창 지지로 돌아서지 않은 데에 결정적으로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노사모' 로 대표되는 사회 내부의 새로운 자유주의세력의 적극적인 활동과 지방의 주변적 인텔리층의 참여 역시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때문에 그의 당선이 16대 대선에서 대체로 이회창을 지지한 한국의 이른바 '주류세력' 내지 지배층 전체에게 준 충격은 실로 큰 것이었다. 노무현정권 하에서는 무엇보다도 주요 요직의 인적 교체와 지배시스템 전체의 탈권위주의화 등이 적극 추진되고 있고, 시민운동세력의 국정 참여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위에서의 논의와 관련하여 다음의 두가지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첫째, 우리는 1987년 6월 투쟁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적어도 절차적-형식적 측면에서는 굴곡을 거치면서도 크게 보아 진전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파악이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를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간접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국가보안법의 존속 등이 간접민주주의의 온전한 구현도 방해하는 가장 중요한 방해물이라는 점, 나아가 국가보안법 등이 노무현정권 하에서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고 그 폐지가 쉽지 아니라는 점에 비추어 한국의 민주주의는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는 점 등에 유의해야 한다.
둘째, 1987년 이후 한국 국가체제의 변화과정은 국가형태의 측면에서는 노태우정권 하에서 '(자유민주주의적 요소들이 대폭 가미된) 완화된 파시즘체제'로 이행하고 김영삼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그것이 '제한적 자유민주주의체제'로 변모했으며, 이후 '제한적 민주주의체제의 민주화'가 기본적으로 진척되어온 것에 의해 특징져진다. 이 과정은 군부파시즘체제와 대결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범민주연합'의 상층부를 형성한 자유주의세력이 노태우정권 하에서 이루어진 '3당 통합'을 통해 지배블록의 한 분파로 편입해 들어가고, 이후에는 지배블록의 주도적 핵심분파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그간의 한국 민주화과정의 최대의 수혜층은 자유주의세력이었다는 점, 그간의 한국 민주화과정이 무엇보다도 자유주의세력의 자유를 최대화하는 데에 기여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세력이 지배블록의 주도적 분파로 발돋움하게 되었다는 것은 자유주의세력이 이제 피지배대중의 저항과 도전에 맞서 한국자본주의체제의 안정적인 재생산을 총괄하는 가장 핵심적인 세력이 되었음을, 때문에 대중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지배블록의 주도적 분파가 된 자유주의세력과 피지대대중과의 대립-갈등이 한국사회의 대립-갈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2.2. 민주화과정과 정치적-이념적 지형의 변화
1987년 6월 투쟁 이후 한국사회에 민주화과정이 도입된 사실과 관련하여, 많은 학자들은 한국사회가 김영삼정권 하에서 '민주화의 1단계'를 거친 후 김대중정권 수립이후부터는 '민주화의 2단계'에 진입하고 있다거나, 이와 유사하게 한국사회가 김영삼정권 하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기' 내지 '민주주의 공고화의 제1단계'를 거친 후 김대중정권 수립 이후부터는 '민주주의의 공고화' 단계 내지 '민주주의 공고화의 2단계'를 거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의 정치체제가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서도 여전히 '제한적인 민주주의체제'라는 점을 불문에 부친다고 할지라도, 민주주의를 주로 형식적-절차적 관점에서, 그리고 '제도정치의 민주화'의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먼저 그간의 한국의 민주화과정이, 민주화를 추동시킨 가장 중요한 동력이 밑으로부터의 대중투쟁에서 나오긴 했지만, 대체로 '타협적 민주화'의 형태로 진척되어왔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7년 6월의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적 투쟁은 군부정권의 즉각적인 퇴진이 아니라, 국민의 직접-보통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을 가능케 하는 '헌법개정'으로 종결되었었다. 또한 '문민정부'의 수립은 김영삼세력으로 대표되는 (군부정권 하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혜택을 입은 영남지역에 지역적 기반을 둔,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자유주의세력의 한 분파와 파시즘세력과의 타협에 기초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아가 김대중정권의 수립으로 이루어진 '수평적 정권교체'는 김대중세력으로 대표되는 (군부정권 하에서 많은 차별을 받은 호남지역에 지역적 기반을 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자유주의세력의 한 분파와 김종필로 대표되는 수구보수세력과의 합작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은 군부정권과 싸우는 과정에서 형성된 '저항블록'의 상층을 차지한 자유부르주아세력이 지배블록의 주요 분파 중의 나라로, 그리고 그것에 이어 핵심 분파로 상승하고, 또 이로써 자신을 재정비해 나간 지배블록이 반독재민주화투쟁에 동원된 대중의 정치적 능동화를 최대한 억누르는 과정을 동반했다. 이 점에서 그간의 한국의 민주화과정은 피지배대중을 정치의 명실상부한 주체로 상승시키는 과정을 동반하는 '능동혁명'이 아니라, 그람시(A. Gramsci)가 말한 '수동혁명'(the passive revolution)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는데, 이는 한국의 민주화가 그간 자유주의세력의 헤게모니 하에서 이루어진 사실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한국의 민주화과정의 헤게모니 세력으로 등장한 자유주의세력은 한편으로는 피지배대중의 정치적 능동화를 저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많든 적든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의 자유민주주의적 개혁 및 파시즘체제 하에서 형성된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를 포함한) 대외적 관계 전반의 개혁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세력은 '수구 대 개혁'의 슬로건을 개혁추진을 위한 기치로 내걸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구 대 개혁'의 슬로건을 '보수 대 진보'의 슬로건과 등치 시키기도 했다.
다른 한편, 민주화과정의 진척과 더불어 과거의 파시즘세력은 민주화과정에 저항하면서도(파시즘세력으로서의 자신의 이전의 정치적 성격을 계속 고수하는 한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주화과정에 자신을 순응시켜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파시즘세력은 -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꼴통' 수구들을 제외한다면 - 민주화와 개혁이 파시즘체제에서 자신이 누린 기득권들과 파시즘체제에서 형성된 제반 사회적 관계 및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 등을 포함한) 한국의 대외적 관계들을 최대한 해치지 않도록 민주화과정을 뒤틀고 지체시키면서도 민주화과정 등에 적응해 나가는 '수구보수세력' (이하 수구세력으로 약칭함)으로 자신의 정치적 성격을 변화시키게 된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오늘날의 한국의 수구세력이란 '민주화과정에 자신을 일정하게 적응시킨 구파시즘세력'으로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와 관련하여 다음의 점들이 지적되어야 한다.
첫째, 민주화과정이 진척되면, 파시즘체제하에서 제도정치로부터 축출당한 야당세력이 지배블록으로부터 배제되는 것과는 달리, 부르주아적 야당세력 역시 지배블록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때문에 자유주의세력이 내건 '수구 대 개혁'의 구호란 기본적으로 사회발전의 방향 등을 둘러싼 '지배블록 내부의 대립' 내지 '지배블록의 주도적 분파 자리를 내 준 수구세력 대 주도적 분파가 된 자유주의세력간의 대립'의 표현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둘째, 한국의 수구세력은 멀리는 친일세력에게, 가까이는 파시즘세력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엇보다 파시즘체제 하에서 획득한 자신의 기득권은 물론, 파시즘체제에서 형성된 제반 사회적 관계 및 (미국과 북한과의 관계 등을 포함한) 한국의 대외적 관계들을 최대한 유지시키려고 한다. 때문에 이들이 대변하는 보수주의란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를 최대한 지키고 그 가치에 적합한 형태로 사회적 관계와 대외적 관계 등을 변화시키려는 이른바 '합리적 보수주의' 내지 '온건 보수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러한 합리적 보수주의의 입장에서도 개혁의 과제가 산적해 있다. 그런 만큼 자유민주주의적 개혁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서 성취된 나라의 합리적 보수주의와 달리, 한국적 상황에서 합리적 보수주의는 자신을 '개혁적 보수주의'로서 출현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한국의 수구적 보수주의의 대표자 중의 한사람인, 최근 한나라당 대표가 된 최병렬 같은 이는 자신의 노선이 '합리적 보수주의' 내지 '온건보수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으로 더 한층 위기에 몰린 한국 수구보수주의의 자기반성의 표현이자 자신의 수구보수주의적 노선을 민주개혁 과정에 더 많이 적응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실제로는 수구보수주의의 질을 지닌 자신의 노선을 '합리적 보수주의'로 치장함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확대하기 위한 본질 은폐적인 주장 이상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수구세력은 자신의 보수주의가 한국적 상황에 가장 합당한 보수주의의 진정한 형태라고 믿는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자신의 보수주의만이 합리적 보수주의이고, 극단적인 것이 아닌 온건한 보수주의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관점에 선다면 그들의 눈에는 합리적 보수주의 내지 한국적 상황의 '개혁적 보수주의' 역시 당연히 불순한 '좌파노선' 등으로 비춰지지 않을 수 없다.
셋째, 1987년 6월 이후 자유주의세력이 추진해 왔고 또 추진하고 있는 여러 민주개혁들은 크게 보면 파시즘체제의 성립과 그 체제가 남긴 유산으로 피지배대중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한국의 지배질서를 '합리화'함으로써 한국의 자본주의적 지배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재생산시키려는 시도로서 의의를 지닌다. 이 사실은 자유주의세력이 이미 지배블록의 주도적 분파로 등장했고, 또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유지되는 한 설령 정권에서 밀려날지라도 지배블록의 주요 분파로서 활동하게 될 오늘날의 조건 속에서 '합리적 보수세력'이란 다름 아닌 곧 '자유주의세력'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때문에 오늘날 자유주의세력이 제창하는 '수구 대 개혁'이란 사실은 지배블록의 양대 분파를 형성하는 '수구적 보수세력'과 '합리적 보수세력' 간의 대립관계의 다른 표현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는 사회의 대립관계를 - 그 대립관계가 지금 현재 가장 중요한 사회적 대립관계로 표출되고 있든 아니든 - 일차적으로는 사회의 '객관적인' 계급적 관계와 관련시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 선다면 자유민주주의체제하에서도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객관적인 대립관계는 '노자대립관계가 중심을 이루는 지배블록 대 피지배대중간의 대립관계'이다.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대립관계 속에서 노동자-민중운동의 성장에 기초하여 피지배대중인 노동자-민중의 이익의 실현을 우선시하는 이념을 '진보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런 관점에 선다면, 우리는 '보수 대 진보'를 사실은 - 그것이 수구적 보수주의이든 아니면 합리적 보수주의이든 - 지배블록의 '보수주의' 대 지배블록에 대항하는 노동자-민중운동의 '진보주의'간의 대립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자유주의세력이 '보수 대 진보'와 등치 시키는 '수구 대 개혁'란 사실은 지배블록 대 피지배대중의 관계와 관련되는 '보수 대 수구'와는 다른 것이 된다.
그런데 자유주의세력이 '수구 대 개혁'을 사회의 가장 중요한 대립구도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계급적 입장에서는 자신이 추구하는 개혁만이 진정한 개혁으로 비춰지는 사정을 반영한다. 다른 한편, 그런 구호의 제창은 대중의 눈에 자유주의세력의 노선이 지닌 보수성을 은폐하고, 또 그럼으로써 자유주의세력이 주창하는 노선 아래로 변화를 바라는 대중을 동원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와 아울러 아래의 두 가지 점이 더 지적될 필요가 있다.
첫째, '수구 대 개혁'이 기본적으로 지배블록 내부의 양대 분파인 수구세력과 자유주의세력간의 대립을 표현하는 것이긴 하지만, 기층민중운동 및 진보운동은 그 개혁이 민주개혁의 성격을 지닌 한 - 그 개혁이 자유주의세력이 추진하는 개혁이라는 점에서 기층민중운동 및 진보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한계를 지닌 것이기 하지만 - 개혁의 지지세력으로 출현하게 된다. 이로 인해 자유주의세력과 노동자-민중세력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와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서로 대립관계를 맺으면서도 수구세력과의 싸움에서는 서로 연대하는 관계를 맺는다.
둘째, 자유주의세력은 '수구 대 개혁'을 내세우면서 수구세력과 싸우지만, 그들이 아무리 치열하게 싸울지라도 기층민중운동과 진보운동과 관련해서는 지배블록에 속하는 성원으로서의 공동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단결하며, 특히 그들 모두의 공동이익을 위협하는 대중의 저항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단결은 더욱 강화된다. 이 경우 ( '자유주의의 보수화' 등을 통해) 수구세력과 자유주의세력이 서로 융합하거나 수렴하는 현상이, 그리고 이를 통해 '수구 대 개혁'의 대립구도가 소실하는 현상 내지 '누가 수구세력이고 누가 개혁세력인가'가 모호해 지는 현상이 생겨나게 된다. 나아가 자유주의적 개혁이 진척되면 될 수록 '수구 대 개혁'의 대립구도 역시 갈수록 더 많이 모호해지지 않을 수 없다.
2.3. 신자유주의적 개편과 정치적-이념적 지형
한국의 민주화과정은 이전에 저항블록의 상층부를 형성한 자유주의세력을 한국 지배블록의 주도적 분파로 상승시켰다. 이들 자유주의세력이 한국자본주의체제의 유지재생산을 총괄하는 지위로 상승한 시기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이 세계 전체를 휩쓸고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앞에서 우리는 전두환정권 역시 국가주의적 성장전략을 추진하는 가운데에서도 그간의 국가주의적 성장전략이 야기한 한국자본주의의 축적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국가주의적 성장전략을 기본적으로 추진하는 가운데에서도 추산업구조조정과 민간경제 우위체제로의 전환 등을 일정하게 모색했다는 점을 밝혔다. 이런 시도는 노태우정권 하에서도 이루어졌으며, 특히 기업 수준에서 추진된 이른바 '신경영전략'은 기업수준의 대노동정책이 이전의 병영국가적 노동통제정책에서 신자유주의적 노동통제정책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탄이었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적극 편승함으로써 한국자본주의의 미래를 개척하려 한 김영삼정권이 한국의 WTO 체제 가입과 더불어 '세계화'를 높이 제창하면서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한국시장의 대외적 개방화 및 국공유기업의 민영화 등이 크게 진척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영삼정권이 신자유주의적 개편의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로 추진한, 노동유연화를 높이기 위한 정리해고제의 도입 시도 등은 각계의 광범위한 연대투쟁을 불러일으킨 민주노조진영의 96년 말-97년 초의 총파업투쟁에 부딪쳐 크게 진척되지 못했다.
97년 12월 15대 대선기간 중 외환-금융위기가 터짐으로써 한국경제는 미증유의 위기국면에 내몰리게 된다. 그런 정세 속에서 야당후보로 나온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IMF와 미국이 제시한 제반 요구사항들을 유보 없이 수용할 것임을 약속하는 동시에 IMF 처방을 외부로부터 강제된 것이 아니라 '위기 극복과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한 한국민 자신의 프로그램'으로 삼겠다고 천명했다. 그리하여 김대중정권은 그러한 기조 하에서 IMF 처방을 충실히 따르는 가운데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나아가 16대 대선에서 당선된 노무현대통령 역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적극 편승해 한국을 동북아시아의 경제적 거점으로 도약시킨다는 신자유주의적 정책목표를 국정의 제일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우리는 노태우정권의 시기와 김영삼정권의 시기를 '이전의 국가주의적 내지 발전국가적 성장체제가 '신자유주의체제로 이행해간 과도기'로, 김대중정권 수립 이후의 시기를 '신자유주의체제의 성립과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 그러나 이와 동시에 신자유주의체제의 모순이 누적되고 폭발하고 있는 - 시기로 규정내릴 수 있다.
위에서의 논의는 1987년 이후 한국사회의 발전과정이 단지 민주개혁을 둘러싸고 '수구세력'과 '개혁세력'이 대립하는 가운데 민주화과정이 진척되어온 과정만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가리킨다. 오히려 그 과정은 '민주화의 진척'과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이라는 이중적 과정에 의해 중첩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와의 관계를 물어야 하고, 민주화의 진척과 신자유주의적 개편의 맞물림이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와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점들이 지적될 수 있다.
첫째,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적 개편은 이전의 국가주의적 성장체제가 만들어낸 부작용인 '정경유착체제'와 같은 한국자본주의의 전근대적 측면들을 해체시킨다는 점에서 일정한 진보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개방화, 자유화, 탈규제화, 민영화, 사유화, 유연화 등의 구호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중반이후 선진국 자본주의가 빠져들기 시작한 선진국 독점부르주아지의 반동적인 위기타개책으로 출현한 것으로 한마디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가 만들어내는 제반 문제점들을 경제에 대한 사회적-국가적 규제나 분배문제의 해결 등을 위한 국가개입을 통해 해결하려는 제반 조류의 '혁신 자유주의' 내지 '사회적 자유주의' 및 사민주의 등과는 달리) '사회적 관계의 총체를 시장경제적 관계로 재편하거나 시장경제적 관계에 최대한 종속시킴으로써 자본운동의 자유를 극대화하려는 현대자유주의의 새로운 조류'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회적 관계의 총체를 시장경제적 관계로 재편하거나 시장경제적 관계에 종속시켜 나가면 구조적 실업층의 확대, 상층노동자를 제외한 모든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와 불안정노동의 확대, 다수 노동자의 주변노동자화, 노동과정에서의 노동강도의 강화와 다수노동자들의 임금하락, 사회적 불평등의 증대,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소수로의 부의 집중과 다수대중의 빈곤화 등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본질적으로 반노동자적-반민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 점은 자본주의사회의 노동운동이 노동자대중의 권익 보호를 위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와 자본운동의 자유에 대한 민주적-사회적 규제의 확대와 탈상품화 영역의 확대 등을 위한 운동, 즉 '시장에 대항하는 정치'(politics against market)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반면, 신자유주의란 한마디로 '시장을 위한 정치'(politics for market)로 규정될 수 있는 사실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노동자-민중운동 및 노동자-민중의 권익을 우선시하는 '진보'운동은 신자유주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신자유주의반대'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신자유주의가 본질적으로 반노동자적-반민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적 개편이 본격화되면 될 수록 무엇보다도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더 많이 훼손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훼손되면 될 수록 설령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가 진척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형애화와 공동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고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가 다수대중의 삶의 향상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소수상층을 위한 민주주의로 더한층 전락해 가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이런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개편이 본격화되면서 한국사회에서도 대거 일어났고, 또 오늘날에도 우리의 목전에서 대거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태전개는 우리가 다수대중의 삶의 관점, 노동자-민중의 관점에 선다면 (지금 현재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 설령 크게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할지라도) 다른 어떤 것보다 사회적-정치적 중요성을 지닌 문제로서 인식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개편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저항은 많든 적든 일어나지 않을 수 없고, 신자유주의적 개편이 강행되면 될 수록 그 저항 역시 커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저항의 증대는 신자유주의적 개편을 주도하는 국가에 의한 저항운동에 대한 탄압의 증대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과정에서 국가는 공권력의 사용을 문제해결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앞세우는 '신자유주의적 경찰국가' 내지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국가'로 퇴행하게 된다. 실제로 김영삼정권은 '세계화'를 제창하면서부터 뚜렷하게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정권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김영삼세력이 파시즘세력과 대립관계에 서 있을 때에도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자유주의세력에 속했다는 사정을 반영하여 김영삼정권이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정권으로 변모하면서부터 이들 세력의 성격은 사실상 수구세력으로 변질되었다. 이와는 달리 김대중세력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자유주의세력에 속했기 때문에 축적위기 국면에서 집권하지 않았더라면 '혁신자유주의' 내지 '사회적 자유주의' 세력으로 성장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김대중정권 역시 다시 재발한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수단으로 제2차 구조조정을 강행하고 상시적 구조조정체제의 확립을 추진한 집권 중반기 이후부터는 사실상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정권'으로 전락했다. 나아가 가장 개혁적인 자유주의세력을 대표하는 노무현 정권조차도 철도노동자 및 화물연대에 대한 애초의 일정한 양보가 수구세력 전체의 광범위한 비난에 부딪치고 한국경제의 불황이 깊어지는 정세 속에서 집권 6개월이 겨우 지난 현재 이미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국가로 퇴행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경찰국가 내지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국가로의 퇴행은 역으로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조차 실질적으로 후퇴시키는 과정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실질적 후퇴는 다시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의 법률적-제도적 후퇴 등을 가져올 가능성을 높인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자유주의세력 주도하의 민주화가 노동자-민중의 삶과 권익의 증진과 관련해서는 이미 거의 한계에 부딪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경찰국가 내지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국가로의 퇴행현상 등과 관련하여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병행발전'이란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임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오늘날 한국에서 자유주의세력이 주창하는 '개혁'은 실제로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이들이 주창하는 개혁은 크게 보아 '민주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신자유주의적 개편을 위한 것'으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자유주의세력이 주창하는 개혁이란 사실은 '민주개혁과 반민주적인 신자유주의적 개편'의 두 가지 모순적인 측면을 지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신자유주의적 개편은 적극 추진하는 한 민주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고, 민주개혁을 추진할지라도 그 개혁이 곧장 한계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수구세력은 과거의 파시즘체제 하에서는 '국가주의적-보호주의적 정책'의 강력한 옹호자였었다. 그러나 이들 세력 역시 신자유주의가 시대의 대세임을 인식하면서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과 한국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의 적극적인 순응 등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신자유주의의 옹호자로 변모하게 된다. 이런 관계로 한국 지배블록의 양대 분파인 수구세력과 자유주의세력은 오늘날 '민주개혁'의 문제 등과 관련해서는 서로 대립하고 타협하면서도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태도 면에서는 서로 같은 입장을 취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노동자-민중운동 및 진보세력의 운동에 대항하는 공동연대전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신자유주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수구세력을 신자유주의적 개편을 자신의 기득권의 보호와 결합시키려는 '수수적 신자유주의세력'으로, 자유주의세력은 신자유주의적 개편을 우리 사회의 민주개혁 - 이 민주개혁은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적 민주개혁이라는 한계를 지닌 것이다 - 결부시켜 나가려는 '개혁적 신자유주의세력'으로 규정할 수 있다.
셋째, 1987년 6월 투쟁이 가능케 한 한국사회의 민주화과정은 노동운동을 비롯한 기층민중운동이 본격적으로 성장-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민주화과정은 동시에 주로 신중간층을 사회적 기반으로 하는, 기층민중운동과는 구분되는 '시민운동'이 본격적으로 출현하는 조건을 창출해 주었다. 그런데 오늘날 '경실련'운동과 '참여연대'운동으로 대변되는 시민운동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를 반영해 시민운동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자유민주주의적 민주개혁을 지지하면서도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개편 역시 지지하고 있다. 이때 '경실련'이 신자유주의적 개편 그 자체를 중시하는 '시민운동의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부분'을 대변한다면, '참여연대'는 신자유주의적 개편과 민주개혁과의 결합 및 시장경제의 병폐의 제거 등에 관심을 표명하는 '시민운동의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부분'을 대변한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시민운동세력들은 기본적으로 '개혁적 신자유주의세력'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들 시민운동세력은 민주개혁의 내용, 속도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제도정치권의 자유주의세력과 긴장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크게 보면 제도정치권 자유주의세력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기반이자 사회적 충원지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런데 집권 말기에 김대중정권이 저지른 실정과 친인척들의 비리 등은 많은 대중들을 김대중정권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고, '박정희 향수' 등이 생겨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김대중정권 말기에는 수구세력이 권력을 재탈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지만 민주화과정의 도입과 더불어 점차 자유주의적 입장으로 선회한 많은 30대층이 노무현을 처음부터 적극 지지한 데에다가 민주화과정이 진척되는 조건 속에서 성장한 덕분으로 자유주의적으로 정향된 많은 20대층이 정몽준이 대통령후보직에서 물러난 후 노무현을 지지한 데에 크게 힙 입은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이러한 새로운 자유주의적인 젊은이 층의 존재는 앞으로도 수구세력의 집권을 막는 가장 커다란 방패막이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이들 젊은이 층들이 설령 노무현정권에 실망해 노문현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고 할지라도 - 실제로 수구세력과 일정하게 타협해야 하고, 또 여러 이유로 스스로 보수화되어가는 노무현정권이 이들 젊은이 층의 요구를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충족시켜 나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 , 자신의 지지를 수구세력에게로 옮기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관계로 내각책임제로의 개헌을 반대해온 한나라당에서도 오늘날에는 내각책임제로의 헌법개정 등이 거론되고 있는 것은 이들 젊은이 층의 투표성향에 비춰볼 때 대통령제 하에서 한나라당에게 집권의 기회가 오기가 어렵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한편, 이들 젊은이 층들은 크게 보아 '신자유주의적'으로 정향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젊은이 층들의 이런 성향은 노동자-민중세력이 전개하는 신자유주의반대투쟁의 확산을 막는 커다란 걸림돌로 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자유주의적 젊은이 층은 지금은 경쟁사회가 자신에게 앞으로 많은 기회를 줄 것으로 믿고 있지만, 그 다수는 미래에 신자유주의적 경쟁관계에서 탈락하는 운명에 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본다면, 이들 사회층의 많은 부분이 다시 급진화될 가능성 역시 다대하게 존재한다고 하겠다.
다섯째, 진보세력은 앞으로 의회에 진출할 기회를 갖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진보세력이 의회진출에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의회정치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칠 만큼 성장하기란 적어도 가까운 장래까지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기층민중의 삶이 갈수록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조건 속에서 진보운동은 앞으로도 가장 중요하게는 노동자-민중의 직접적인 대중투쟁의 형태로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노동에 대한 권력과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세는 일정한 물질적 양보 능력을 지니고 있는 재벌기업들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포섭하고, 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오늘날 일정하게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하는데, 이런 경향의 대두는 그간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동을 주축으로 하여 성장해 왔다는 점에 비추어 한국 노동운동 전체의 위기를 가져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 노동운동이 다시 새롭게 도약하려면 무엇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기초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정규직 노동자들 간의 연대의 구축이 요구된다. 이와 관련해, 특수고용노동자로 불릴 수 있는 화물연대노동자들이 최근 강고한 투쟁을 전개한 것, 현대자동자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합을 결성한 것 등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매우 중요한 시도로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오늘날 이념적으로는 크게 보아 '사민주의세력', '반제 민족주의세력', 여러 갈래의 '변혁적 좌파세력'으로 나눠져 있고, 진보세력 내부에서는 사민주의적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다수파를,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적 세력가 소수파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문제와 관련하여 사민주의세력은 '케인즈주의'의 입장에서, 반제 민족주의세력은 '남북한 협력을 통한 자립적 민족경제 형성'의 입장에서, 변혁적 좌파세력은 '사회주의' 또는 '코뮌주의'의 입장에서, 그리고 민족을 넘어서는 세계노동자-민중의 연대를 중시하는 '국제주의' 입장에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있다.
2.4. 한미관계, 남북한관계 등에 대한 태도
오늘날 지배블록의 양대 분파를 형성하는 수구세력과 자유주의세력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노동자-민중운동 및 이에 기반을 둔 진보운동과 관련해서는 서로 동맹관계를 맺고 공동으로 대응하고 있고, 또 이 과정에서 대체로 '개혁세력의 보수화'를 통해 이전의 개혁세력이 수구세력으로 전화되고 있지만, 민주개혁 등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타협하면서 싸우고 있고, 싸우면서 타협하고 있다. 다른 한편, 진보세력은 자유주의세력이 민주개혁을 추진하는 한에서는 수구세력에 맞서 시민운동세력과 연대하고 제도정치권의 자유주의세력을 지지하고 있지만, 자본과 지배블록의 근본적인 이익과 피지배대중의 그것이 전면적으로 상치되는 신자유주의문제와 관련해서는 자유주의세력과 수구세력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이처럼 현 시기의 제 세력들 간의 관계는 군부파시즘체제 하에서와는 달리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군부파시즘체제 하에서는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가 모든 대립구도를 압도함으로써 한미관계나 남북한관계 문제가 사회적 대립의 주요한 양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화과정의 도입과 더불어 이런 문제들도 한국사회 발전의 향방과 관련하여 주요한 정치적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크게 보아 보수세력에 속하는 자유주의세력과 수구세력 및 진보세력이 한미관계와 남북한관계 등과 관련해서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가도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점들이 지적될 수 있다.
첫째, 한미관계와 관련하여 자유주의세력은 친미적인 반면, 진보세력은 기본적으로 반미적이다. 그런 가운데 자유주의세력이 부시정부의 군사모험주의적 정책에 비판적이고 한미동맹관계의 개선을 원하고 있는 반면, 수구세력은 미국의 그런 정책에 지지를 보내고 한미동맹관계의 변화에 반대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진보세력은 SOFA개정, 주한미군의 철수 등을 요구하고 있다. 대미관계와 관련해서는 그러나 한국이 미국의 압도적 영향 하에 있는 사정을 반영해 수구세력과 자유주의세력간의 갈등이란 사실상 미미이다. 이로 인해 한미관계의 대폭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진보세력의 운동은 수구세력과 자유주의세력의 공통된 대응에 부딪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자유주의적 젊은이 층들 역시 대미관계의 대폭적인 개선을 요구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현상은 제도정치권의 자유주의세력과 이들 자유주의적 젊은이 층과의 괴리를 크게 증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노무현정권이 비전투병의 대이라크파병을 결정할 때 이들 젊은이 층의 다수는 파병에 반대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노무현정권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 전투병의 대이라크파병을 결정하면 이들 젊은이 층과 노무현정권과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둘째, 남북한관계와 관련하여 수구세력과 자유주의세력은 크게 보면 '자본주도 하의 통일'을 추구하고 있는 반면, 진보세력은 '민중 주도의 통일'에 추구하고 있다. 이때 수구세력은 겉으로는 평화통일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북한의 호전성 등을 들어 '힘의 우위에 기초하여 북한을 압박하고 이에 기초해 북한체제를 붕괴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반면, 자유주의세력은 '관계개선과 협력증진을 통해 북한을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포섭시키고, 이에 기초해 북한체제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에 반해 진보세력의 반제민족주의세력은 '남북한체제의 상호인정에 기초한 연방제통일'을 추구하고 있는 반면 - 사민주의세력 역시 이 입장에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변혁적 좌파는 '남북한체제 모두의 개혁과 변혁에 기초한 민중적 통일'을 주창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대북압박이 가중되고 있는 정세 속에서 자유주의세력과 진보세력 모두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칙을 동의하면서 - 그렇지만 자유주의세력이 '반전'의 '반제-반미'로의 발전을 반대하는 반면, 진보세력은 '반전'운동이 '반제반미운동'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수구세력의 대미추종노선을 비판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미국이 만일 이전의 클린튼 정부에서 같이 대북압박정책을 버리고 북한포용정책을 채택하고 - 이러한 정책변화는 부시정권 하에서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 북한이 보다 시장사회주의적인 체제로 변모하게 되면, 자유주의세력이 입지가 대폭 강화되고, 수구세력의 많은 부분이 자유주의세력으로 자신을 변모시킬 가능성이 존재하며, 진보세력 내의 반제민족주의세력이 신자유주의 반대투쟁보다 통일투쟁을 중시하고 있는 사실에 비춰 반제민족주의세력과 자유주의세력과의 관계가 호전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한국의 정치적 지형이 '(꼴통)수구세력- 자유주의화된 수구세력과 보수화된 자유주의세력 및 진보세력내부의 우파세력 - 변혁적 좌파세력'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적 지형의 그러한 재편은 아직은 추상적인 가능성에 불과하다. 다만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이 대북강경정책을 구사하는 한 자유주의세력의 입지는 약화될 수밖에 없고, '신자유주의 문제를 둘러싼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이 '수구세력의 대북강경책 대 진보세력 중심의 반전평화운동과의 대립'과 중첩되어 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와는 달리, 미국의 대북정책이 북한포용정책으로 변한다면 역으로 자유주의세력의 입지가 강화되고 '신자유주의 문제를 둘러싼 보수 대 진보의 대립'이 '자유주의세력 주도의 신자유주의적인 평화적 대북포섭노선'에 중첩되어 완화될 가능성이 높다.
셋째, 오늘날 한국의 정치적-이념적 지형을 형성시키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지역주의'이다. 이 '지역주의'는 원래 군부파시즘이 자신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 활용함으로써 보편화되었다. 그런데 군부파시즘체제 하에서 조성된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는 지역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지만, 자유주의세력의 김영삼세력과 김대중세력의 분열과 이들 양대 세력에 의한 지역주의의 활용은 지역주의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다른 한편, 지역주의는 오늘날 수구세력의 거점이 되고 있고, 자유주의세력의 보수화-수구화를 촉진시키는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현재 전개되고 있는 개혁신당운동은 지역주의 구도의 타파를 위한 상대적으로 덜 보수화된 자유주의세력의 마지막 시도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이 시도가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을 지는 현재로서는 미지수이다. 이와는 달리 진보세력은 정치지형의 '보수 대 진보'로의 개편만이 지역주의 구도를 타파할 진정한 가능성을 열어 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때 사민주의세력은 무엇보다 진보세력의 성공적인 의회진출을 통해 그 개편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변혁적 좌파세력은 지역적 구분을 넘어서는 노동자-민중의 단결과 이에 기초한 대중투쟁의 활성화를 가장 중요한 방도로서 제시하고 있다.
3.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 중 진보와 보수와의 관계와 관련되는 주요사항들을 정리해 보자
먼저, 과거 군부파시즘체제 하에서는 '보수와 진보'의 대립구도가 크게 보아 '민주 대 반민주'의 대립구도에 의해 규정되었지만, 민주화과정의 도입과 더불어 '(자유주의세력까지 포함하는) 지배세력 대 노동자-민중세력간의 대립구도'로 변모했다.
둘째, '수구 대 개혁' 등으로 불리는 '수구보수주의 대 자유주의의 대립관계'란 사실은 '수구적 보수주의 대 합리적 (내지 개혁적) 보수주의의 대립관계'의 다른 표현이며, 신자유주의 문제와 관련하여 '수구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관계'란 '수구적 신자유주의와 개혁적 신자유주의의 관계'의 의미를 지닌다.
셋째, 오늘날 지배블록의 양대 분파인 수구세력과 (개혁적 보수세력인) 자유주의세력은 '수구 대 개혁'이라는 구도에서는 서로 싸우고 있지만, 신자유주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수구적 신자유주의'와 '개혁적 신자유주의'라는 그들 간의 차이를 넘어 동맹을 맺고 노동자-민중운동과 대립하고 있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수구'와 '개혁'의 경계선이 모호해지는 현상 내지 '수구 대 개혁' 대립구도의 소실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넷째, 신자유주의 문제를 둘러싼 보수-진보의 대립은 한미관계와 남북한관계의 변화양상 및 지역주의 등에 의해 크게 굴절되고 있다.
위에서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민주화과정의 도입 이후 새로운 문제들의 출현 등으로 인해 보수와 진보와의 관계 및 그 내부 세력들의 관계가 매우 복잡해지고 유동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미래에 어느 세력이 더 많은 사회적-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세력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인지 역시 아직 열려있는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답은 결국 어느 세력이 허구적 환상을 심어주는 것을 통해서든 아니면 대중의 지성적 능력과 지적 통찰력을 키우는 것을 통해서든 대중의 마음을 더 많이 사로잡는 세력으로 성장-발전할 수 있을 것인지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민주화과정의 도입과 더불어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 등이 어느 세력에 속하든 그 이름으로 타 세력들과 갈등하거나 타협하는 '보편적 가치' 내지 '보편적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더 많이 지니게 됨을 목격하게 된다. 그러한 긍정적 가치들이 '보편적 가치' 내지 '보편적 이데올로기'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반공'과 같은 부정적 가치의 보편화를 통해 '누구 진짜 반공이냐'를 둘러싸고 주형 되던 과거에 비해 분명히 진보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파시즘체제 역시 민주주의라는 긍정적 가치를 내세우면서 그 가치를 허구적인 것으로 만들었는데, 민주화운동은 파시즘이 내세우는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그 허구성에 대한 인식을 대중화-보편화시키는 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가 크게 진척된 오늘날에도 민주주의와 같은 긍정적 가치들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투쟁이란 그러한 보편적 가치들을 허구화시키는 힘들과 그러한 가치들을 참으로 보편적인 긍정적 가치로 만들려는 힘들 간의 투쟁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이 시대의 수구란 보편적 가치를 '허구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이념, 운동인 반면, 이 시대의 진보란 그 가치들을 보편적 가치에 걸 맞는 보편적 가치로 상승시키는 이념, 운동이라고 규정지울 수 있을 것이다. 수구는 허구화된 보편적 가치들을 대중적인 것으로 전화시키는 데에 성공하면 할수록 힘을 증대시킬 수 있는 반면, 진보는 역으로 허구성을 벗겨낸 보편적 가치들을 대중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하면 할수록 힘을 증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진보의 과제는 '민주주의의 민주화', '인권의 인권화', '평화의 평화화'를 참으로 대중적인 힘으로 전화시키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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