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공동체운동과 맑스 / 강수돌
  ㅁㄱㅁ DATE 2005-05-10 20:36:30  HIT 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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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의 자료집에 있는 발제문 중 하나입니다.

출력해서 보려고 글씨체 좀 바꿔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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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공동체운동과 맑스

강수돌


1. 현대공동체운동에 대한 관심

현대공동체운동은 무엇이며 맑스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맑스는 '공동체' 아이디어를 어떻게 보았을까? 현대공동체운동은 과연 맑스가 말한 '자유의 나라'를 여는 것인가? 역으로 맑스는 현대공동체운동의 발전과 대안 창조에 얼마나 많은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가?
보다 구체적으로는, 현대공동체운동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묵인하고 단지 그 외곽에서 섬처럼 존재함으로써 사회적 모순의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현대공동체운동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모순이나 여타 사회적 모순들을 극복하고 삶의 새로운 희망을 여는 대안이 되는 것인가?

여기서 말하는 '현대공동체운동'이란 주로 1960년대 이후 전 세계 곳곳에서 전개된 반(反)문화운동에 영향을 받아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하고 새로운 문명과 대안적인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사회운동을 말한다(맥러플린/데이비드슨 2005:11).
사실 공동체(Gemeinwesen)란 말은 워낙 포괄적이어서 역사적으로 전개되어온 인간 사회 형태(예, 원시공동체,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제, 현실 자본주의, 현실 사회주의)를 모두 공동체로 파악할 수도 있다. 심지어는 계급모순을 감추기 위해 민족공동체, 국가공동체라는 말도 나왔다. 또 각 수준의 행정 단위(예, 도-시-군-읍-면-동)를 공동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Gemeinschaft, community, commune)는 공통의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삶의 문제를 집단적 협동으로 해결하려고 만든 '생활구성체'로 정의한다. 이 점에서 공동체는 그 속에 새로운 사회관계를 함축한다.
미국 사회학자 힐러리는 <공동체의 정의들>에서 공동체 유형을 무려 94개로 나누고 있다(같은 곳). 공동체의 역사는 선사 시대의 부족공동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우리가 정의한 개념에 맞는 공동체는 기원전 6세기경의 불교의 승가공동체 이후 기독교 등 각종 종교공동체가 주류를 이루다가, 18세기 이후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그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유토피아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다. 그 뒤 현대공동체는 대체로 1960년대 이후 '후기자본주의'가 초래한 복합 모순을 근원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소규모이지만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주로 1980년대 이후 마을공동체, 생협공동체, 교육공동체 등이 생성되고 있다.

현대공동체운동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또 직접 실천을 하는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로 다양하지만, 공통된 핵심은 '삶의 과정 속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다. 맑스/엥겔스도 <독일이데올로기>에서 인간이 역사를 만드는 전제조건으로 크게 세 가지를 드는데, 그것은 먹고살기(욕구 충족) 위한 수단의 생산, 새로운 욕구의 생성, 새로운 사회관계(예, 가족)의 발전 등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현대공동체운동의 구체적인 역사성은 주로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내지 계급적 토대에 의해 각인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현대공동체운동의 출발점은 일차적으로 현실 자본주의 삶의 구조가 초래하는 모순에 대한 환멸이다. 치열한 경쟁 구조와 무한 이윤 추구 시스템은 증가하는 명목 임금이나 물질적 소비 수준에도 불구하고, 행복이 아니라 스트레스와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더 많은 소유나 더 많은 소비가 결코 행복을 낳지 못한다는 판단,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인식이 새로운 삶의 양식을 추구하게 되는 한 배경이다. 이것은 교환가치와 가치법칙이 지배하는 자본제 아래서 물신성, 노동소외, 노동자 궁핍화, 사회양극화가 강화된다고 보는 맑스의 문제의식과 일치한다.
이와 연관된 점이 노동조합 운동의 전망과 연관된다. 노동조합은 노동자 사이의 경쟁을 지양함으로써 자본에 대한 교섭력을 증대시켜 인간다운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을 쟁취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노조가 정권과 자본의 전략 앞에 무력화되거나, 다른 편으로는 노조가 정권과 자본의 일 구성부분이 되어 더 이상 새로운 삶의 전망을 열어내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기 일쑤다. 궁극적으로는 노조나 노동자 정당을 통해 사회적 생산관계를 혁파하고 보편적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을 성취한다는 전망이 불투명해지기에 새로운 운동 형태를 모색하게 된다.
게다가 1960년대 말이 되면 '현실 사회주의' 나라들조차,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집단화를 바탕으로 일정한 물질적 성취를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관료주의, 생산력주의, 산업주의, 가부장주의, 인간중심주의(그것의 한 반영인 반생태주의), 획일주의 등 토대와 상부구조 모두에서 모순과 한계를 노정시킨다. 이에 현실 자본주의는 물론, 현실 사회주의조차 진정한 해방을 안겨다주지는 못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대안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한편,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국가주의라는 중앙집권적 권력 불평등 체제의 한계를 드러낸다. 서구로 대표되는 '복지국가 자본주의'나 소동구로 대표되는 '인민국가 사회주의'는 모두 국가 권력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 인민 대중의 권력 소외를 낳았고 동시에 권력자들의 부패를 낳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삶의 질 향상에 중요한 복지 문제를 국가에 장기 의존함으로써 민중의 자율성과 책임성이 훼손되었다. 따라서 투표나 선거를 통해 나 자신 안의 권능을 엘리트에게 이양함으로써 스스로 복속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 자치를 통해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 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반성이 새로운 삶의 조직화 방식을 낳는다.
이와 함께 두 체제 모두 '파이'를 가능한 한 크게 '생산'하는 것,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또 비록 엄청난 힘 싸움이 따르긴 하나, 둘 다 '파이'를 비교적 공정 '분배'하자는 데 공식적으로는 동의한다. 그러나 어느 체제도 파이의 '원천'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 하지 않는다. 사실 파이의 원천은 대체로 사회적 약자나 제3세계, 자연 생태계의 희생에 근거한다. 이를 묵인한 채, 가능한 한 파이를 크게 만들어야 한다는 성장주의나 개발주의를 모두 수용하고 있는 셈이다. 현대공동체운동은 따라서 계급 모순에 대한 지양을 한 걸음 더 넘어가고자 하는 실천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노동영역 이외에도 가족영역, 자연영역, 위계질서, 문화영역, 여성문제 등에까지 확장된 계급모순을 포괄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실천이라고 볼 수도 있다.


2. 현대공동체운동의 제 형태

이와 같이 삶의 과정 속에서 참된 행복을 추구하려는 현대공동체운동은 크게 보아, 일원성 속의 다양성, 분권성 속의 자율성, 순환성 속의 연관성이라는 가치들을 기반으로 한다. 공허함과 좌절감, 불평등과 두려움을 증가시키는 현실을 지양하기 위해 공동체운동은 더 이상 기존 가치들을 내면화하지 않는 것이다.
일원성 속의 다양성이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생명체라는 인식를 가지면서도 각 존재가 나름의 다양한 형태와 색깔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분권성 속의 자율성이란 중앙집권적 위계질서에 반대하고 소규모 단위의 자치적인 살림살이를 지향하면서 자립적이고 책임성 있게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순환성 속의 연관성이란 삶의 전 과정이 생성-발전-소멸-재생이라는 틀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상호관련을 맺으며 전개된다고 보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가치지향성을 갖는 공동체운동일지라도 참여하는 주체들의 동기나 역량, 상황적 조건 따위에 따라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여기서 종교공동체는 일단 논외로 치고, 일상 과정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창조하려는 공동체를 그 동기나 강조점에 따라 구분하면 생산공동체, 마을공동체, 교육공동체, 소비공동체, 화폐공동체 등 다섯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생산공동체는 대개 노동자 협동조합이나 유기농업 공동체의 모습을 띤다. 노동자 협동조합은 자주관리 이념과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모든 일꾼들이 공동 노동, 공동 경영하고 공동 분배한다. 예컨대 스페인의 몬드라곤이나 한국의 논골 의류생산자협동조합, 안산의 자활공동체 '실과 바늘'(의류봉제), 고양의 협성생산공동체(무공해 비누), 우리건설 노동 공동체, 소나무 출판공동체 등이 있다. 유기농업 공동체는 미국 테네시주의 팜 공동체의 초기 모습, 호주나 스위스의 퍼머컬쳐, 한국의 공생농 두레, 변산공동체, 한울공동체 등이 대표적이다. '농협'도 원래는 농민의 자주적 생산공동체라야 바람직하다.
마을공동체는 도시든 농촌이든 친밀한 인간관계와 자연친화적인 삶에 바탕을 두고 더불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각 가정이 독립적인 경제 단위를 갖기도 하고, 여러 가정이 공동의 경제 단위를 운영하기도 한다. 예컨대 독일의 레벤스가르텐(농)이나 우파 파브릭(도), 미국 애리조나주의 아르코산티(도), 덴마크의 크리스챠니아(도), 한국의 산청 안솔기마을(농), 홍성 문당리(농), 부산의 물만골(도)은 독립적 가정들이 친밀하게 모여 사는 것이고, 일본과 한국의 산안마을(야마기시 실현지)(농), 문경의 작은누리 공동체(농)는 여러 가족이 하나의 경제 단위를 꾸려 함께 산다.
교육공동체는 영성/인간/생태 교육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로, 한국에도 급속히 생성되고 있는 다양한 공동육아나 각급 대안학교들(산청/제천/군위 간디학교, 실상사 작은학교, 분당 이우학교, 함양 녹색대학 등), 영국의 슈마허 칼리지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소비공동체는 생태적으로 건강한 유기농산물 위주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려는 운동체다. 미국이나 일본의 CSA(공동체지원농업) 운동이나 한국의 한살림과 같은 생활협동조합(생협)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 외 서울의 아름다운 가게나 과천의 녹색가게, 대전의 민들레 의료생협 등도 소비공동체의 일종이다.
화폐공동체는 중앙은행권이 가진 권력의 문제나 이자, 축적, 환경 파괴 등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지역과 나눔, 배려와 감사 등 기본 가치 위에 대안화폐(지역화폐, 녹색화폐라고 불리기도 함)를 사용하는 집단이다. 캐나다의 레츠(LETS) 운동이나 미국의 이타카 아워즈, 한국 대전의 한밭레츠 등이 대표적이다. 한편,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처럼 빈민들의 자립성 향상을 위해 소액을 무담보로 대출하는 금융공동체도 있다. 한국에서는 '신나는조합'이 있고 '사회연대은행'도 있다. '신협'도 원래는 주민들의 상부상조를 위한 금융공동체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이런 형태들은 현실에서 서로 겹치기도 한다. 예컨대 '민들레'(대안교육 전문지)에서 시도하는 배움품앗이는 인터넷을 활용, 교육공동체와 소비공동체가 결합된 것이고, '한살림' 등의 생협이나 한울공동체는 생산공동체(유기농산물)와 소비공동체가 결합된 것이다. 또 야마기시 실현지(산안마을)나 변산공동체는 생산공동체와 마을공동체가 결합된 것이다.


3. 현대공동체운동과 맑스 : 이론적 범주에 대한 고찰

이러한 현대공동체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가장 단순한 물음은, 이것을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좌절한 나머지 현실 도피하는 사람들의 은신처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삶의 양식을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희망의 대안을 만드는 창조적 시도라고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둘 다 맞을 수도 있고, 이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현실은 여러 요소가 뒤섞여 있다. 좀 달리 표현하면, 과연 현대공동체운동이 사적 소유의 모순, 노자모순, 도농모순, 육체·정신노동의 모순 등을 지양하고 진정한 사회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은 한편으로 공동체운동이 얼마나 철저하게 새로운 대안을 구축하는가에 따라, 다른 편으론 기존 체제를 바꾸기 위해 사회적 세력관계를 얼마나 변화시키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4. 맑스를 알고 맑스를 넘기 - 삶의 희망 만들기

현대공동체운동이라고 해서 앞서 말한 모든 가치지향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없다. 혹 고루 갖추었다 하더라도 각 운동 단위마다 이해와 실천이 다를 수 있다. 게다가 공동체운동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여러 측면에서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많은 현실을 감안할 때 일관되게 체계적인 운동을 하는 데 장애가 많을 것이다.
앞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현대공동체운동은 무엇이며 맑스와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맑스는 '공동체' 아이디어를 어떻게 보았을까? 현대공동체운동은 과연 맑스가 말한 '자유의 나라'를 여는 것인가? 역으로 맑스는 현대공동체운동의 발전과 대안 창조에 얼마나 많은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가?
이제 정리한다면, 현대공동체운동이란 자본주의를 넘고자 할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가부장주의, 인간중심주의, 관료주의, 반생명주의를 모두 넘고자 하는 자유(해방) 운동이다. 그런 점에서 맑스의 '자유의 나라'를 미래의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이다. 사실 맑스도 '참다운 공동체'가 되어야 인간이 비로소 스스로 소외시킨 사회를 회복하여, 사회적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현대공동체운동이 맑스의 '자유의 나라'를 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정적인 답을 구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현실 운동의 구체상은 실로 다양하고, 참여자들의 의식이나 만들어지는 규칙과 제도, 기존 사회와의 관계 등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맑스의 '필연의 나라'를 공동체운동이 지양하고자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맑스가 공동체운동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서도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자본주의가 가진 복합 모순을 공동체운동이 지양하도록 또는 반복하지 않도록 만드는 데에 이론적인 지침을 주고 있다고 본다. 결국 현대공동체운동은 결코 자본주의 모순을 묵인하고 단지 그 외곽에서 섬처럼 존재함으로써 사회적 모순의 해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것은 아니고, 부분적이고 소규모이긴 하지만 자유로운 개인, 사회적 개인들의 결사체로서 '참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역사적 과정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모순이나 여타 사회적 모순들을 극복하고 삶의 새로운 희망을 여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기존의 노동자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 등 각종 사회운동과 소통하고 연대해야 함은 물론이다.
사실 현실 자본주의의 동력과 그 가치를 내면화한 대다수 대중은 현대공동체운동을 '배부른 자들의 유토피아 구상'이라 비판할 수도 있고, 자본이나 국가는 이것이 힘을 키우지 못하게 저지하거나 고립시키려 할 것이다. 아직은 극소수이고 힘이 미약하기에 그냥 내버려두어진 채 있지만 대다수가 공동체로 쏠리고 힘이 커지면 마침내 사회적 각축장이 될 수도 있다. 이때 공동체운동은 과연 자기방어 전략과 자원을 갖고 그러한 반동적 저항을 저지할 수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도 공동체운동은 고립적으로 가서는 안 되며 여타 사회운동과 사회적 연대를 부단히 이뤄내야 한다.


- 몇 가지 해결 과제

1) 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물결 속에서 현대공동체운동이 얼마나 큰 돌파구를 열 것인가. 반동 기득권 세력의 저항은 어떻게 할 것인가?

2) 부분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대중들은 거의 대부분 기존 체제와 관념에 젖어 있는데 어떻게 대중들의 주체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

3) 인간의 이기적 욕망의 문제나 원자화된 개인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여 현대공동체운동 안으로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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