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김진숙 지도위원을 타고난 연설가, 선동가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김진숙의 연설을 들으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노동자들의 현실이 너무 서글퍼서이겠지요.
하지만 흐르는 눈물을 닦고, 곧 주먹을 움켜집니다.
아래의 연설문은 작년 9월 집단해고된 부산지하철매표비정규직해고노동자들의 결의대회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 연설문의 내용입니다.
3.11 부산지하철매표해고노동자 고용승계쟁취 3차결의대회 연설문
김진숙(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
봄이 오면 피어나는 게 꽃들 뿐이었겠는가.
봄이 오면 되살아나는 게 나무들 뿐이었겠는가.
꽃보다 먼저 피고 나무보다 먼저 일어서던 사람들.
그때 우리는 기적이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나 서있으면 멈추는 게 아니라 넘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던 그때 우리는 기적이었다.
함께 해야 강해진다는 걸 거리에서 배웠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야 대오가 전진할 수 있다는 걸 스크럼을 짜며 저절로 알게 됐던 그때 우리는 기적이었다.
영도에서 남포동으로
노포동에서 서면으로
철마산에서 장전동으로
우리들의 발길이 닿았던 모든 거리는 해방구가 되었고 기계소리 멈춘 공장은 더 이상 자본의 아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학교로 만들어갔던 그때 우리는 역사였다.
그때 모든 보도 블럭은 짱돌이 되었고, 밤이면 승리의 건배를 올렸던 술병들을
낮이 되면 불붙은 꽃병으로 춤추게 하던 그때 우리는 모두 전사였다.
짱돌을 나르던 손길과 짱돌을 힘차게 팔매질하던 손길들이 만나 허둥거리며 어설픈 사랑을 만들어갔고 불어터진 라면에 신 김치 찢어 얹어주던 그 사심 없는 사랑은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만원이 생기면 짝짝이 신발을 신고 다니던 동지의 운동화를 먼저 사고 천원이 남으면 순대 한 봉지에 젓가락 여덟 개가 꽂히던 그 가난한 사랑은 얼마나 눈물겨웠는가.
남루했으나 아무도 부끄럽지 않았고 더러 울기는 했으나 아무도 외롭지 않았던
그때 우리는 얼마나 당당했는가.
몸은 가둘 수 있으나 신념만은 가둘 수 없노라 감옥에 갇혀서조차 비수처럼 소리칠 수 있었던 그때 우리는 얼마나 빛났던가.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야 했고
차마 묻을 수 없는 천금 같은 사람들을 땅에 내려놓으며
그들을 죽인 세상과 결코 타협하지 말자 맹세했던 그때 우리는 분노조차 희망이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늙어가기 시작했고 분노하는 일에도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기 시작했다.
뛰는 것보단 걷는 게 편하고 걷은 것보다는 차를 타는 게 훨씬 편하다는 자본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고 서있는 것보다는 앉아있는 게 편하다는 걸 알면서는
오래 앉아 있으려면 큰 집이 필요할 거라는 자본의 유혹을 믿기 시작했다.
그런 것들을 지키기 위해선 변해야 했고 그러면서도 우린 세상이 변했다고 믿고 싶어했다.
해방을 꿈꾸던 자들이 제각기 탈출을 도모할 때 세상이 얼마나 변했는가 누군가가 우리에게 물었다.
아침에 나선 곳과 저녁에 잠드는 곳이 다른 사람들.
그래서 늘 칫솔을 꽂고 다니는 사람들.
이제 아무도 기적을 말하지 않을 때 온몸으로 기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우리가 단지 역사를 추억할 때 스스로 역사가 되어가는 사람들.
서러움이 뭔지를 알려거든 그들을 보라.
우리가 잃은 게 뭔지를 알려거든 그들의 눈빛을 보라.
연대를 말하려거든 100일째 펄럭이는 천막엘 가보라.
우리들의 미래가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몹시 궁금하거들랑
비정규직이라 불리는 그들을 보라.
동지 여러분.
지난 2월 23일. 이들과 함께 다섯 걸음 걷고 한 번을 엎드리는 5보 1배를 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날들을 이들은 이렇게 엎드려 살아야 하는가.
어제 오랜만에 점거농성 채비를 하면서 생각했습니다.
181일 동안, 아니 앞으로도 이들은 얼마나 수없이 이렇게 막막한 가방을 꾸려
죄인처럼 집을 나서야 하는가.
마지막 선택으로 들어온 허남식의 선거 사무실에서 몸싸움 끝에 7층 창문으로 달려가던 이 대경 동지를 붙들고 통곡하는 이들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더 울어야, 얼마나 더 통곡을 해야 이들은 웃게 되는가.
맞딱 드릴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 믿고 싶은 그 참담한 절망들과 얼마나 더 맞서야 이 싸움은 끝나게 되는가.
이대경, 조은영, 김은정, 박은정, 박은주, 조은덕, 정효중, 박정민, 정미은, 문문호, 이기선, 김성미, 이영재, 이용재, 조용문, 구혜영, 서재관, 송여정 ,정덕용, 김선아, 정명수, 황이라...
어제 점거농성을 들어오기 전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소주를 한 두잔 씩 나눠 마셨다는 이들의 이름입니다.
해고될 때 태어난 아들내미가 어느 날 보니 이빨이 나있더라는 범진이 애비의 이름입니다.
실업급여마저 끊어졌는데 딸내미가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는 경민이 에미의 이름입니다.
열이 40도까지 오르는 일곱 살짜리 아들을 두고 천막에서 밤을 새워야 했던 준휘 에미의 이름입니다.
아침이면 아버지가 입원해 계시는 병원으로 출근을 하는 어떤 아들의 이름입니다.
할아버지의 부음을 천막에서 들었는데 아버지마저 암일지도 모른다는데 병원에도 모시고 갈 수 없는 서른 살짜리 가장의 이름입니다.
며칠 전 병원엘 가다가 어느 새 옷차림이 바뀐 또래들을 보며 또 울었다는,
그만한 일에도 하나가 울면 다 우는 스물 몇 살짜리 딸들의 이름입니다.
겨울 내내 감기를 달고 살고 181일 동안 단 하루도 단잠을 잘 수 없었던 이들의 이름입니다.
181일 동안 세상으로부터 인간들로부터 밟히고 채이기만 했던 그러기엔 너무도 아까운 이름들입니다.
부르는 것만으로도 서러움이 북받쳐 오르는 이름들입니다.
동지여러분.
저는 우리가 참 멀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뒤돌아보니 우리가 떠나 온 자리에 이들이 서있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제는 노예의 사슬에서 벗어났다고 믿었습니다.
어느 날 되돌아보니 우리가 벗어던졌다고 믿었던 사슬이 이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돼 있었습니다.
비정규직의 자리에서마저 쫒겨난 이들은 어디로 가야한단 말입니까.
이들이 이용석이 되게 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이들이 박일수가 되게 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이들이 김동윤이 되게 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이들이 류기혁이 되게 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이들마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미는 이들마저
129일을 버티다 도무지 그것 밖에는 할 게 없었던.. 김주익이 되게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낮은 곳에 피었다고 꽃이 아니기야 하겠습니까.
발길에 채인다고 꽃이 아닐 수야 있겠습니까.
소나무는 선 채로 늙어가지만 민들레는 봄마다 새롭게 피어납니다.
부드러운 땅에 자리잡은 소나무는 길게 자랄 수 있지만
꽁꽁 언 땅을 저 혼자 힘으로 헤집고 나와야 하는 민들레는 그만큼만 자라는데도 힘에 겹습니다.
발길에 채이지만 소나무보다 더 높은 곳을 날아 더 멀리 씨앗을 흩날리는 꽃.
그래서 민들레는 허리를 굽혀야 비로소 바라볼 수 있는 꽃입니다.
민들레에게 올라오라고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몸을 낮추는 게 연대입니다.
낮아져야 평평해지고 평평해져야 넓어집니다.
겨울에도 푸르른 소나무만으로는 봄을 알 수 없습니다.
민들레가 피어야 봄이 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생애 처음 민들레를 기다리는 봄. 이 설렘을 동지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천막을 친 지 100일을 기념하는 자리가 아니라 181일을 이어온 투쟁을 끝내는 자리여야 합니다.
이제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매표소에 다시 불이 켜지게 하고 이제 저들도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동지여러분.
매일 저녁 서면 허남식 선거 사무실로 모입시다.
모여서 싸웁시다.
비정규직 철폐 해고동지 고용승계의 그날까지 끝까지 함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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